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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도 인정한 한국 의료기술
석 선장’ 계기로 본 한국의 첨단 의료기술
24시간 지속성 신장 투석기 허파꽈리 펴주는 인공호흡기 치료술
‘체외 산소화 기기’ 이용한 인공폐 의식·무의식 컨트롤하는 진정치료
▲ 지난 2월 28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석해균 선장이 기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이 극적으로 회복됐다. 4~5군데 총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로웠던 상황까지 갔지만 국내로 후송돼 집중 치료를 받은 지 한 달여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도 완전히 벗어났다. 석 선장은 이제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 병실에서 가료를 받을 정도로 몸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는 온 국민의 기원 덕분이기도 하지만 한국 의술의 ‘쾌거’이기도 하다.
지난 1월 석 선장이 다발성 총상을 입고 오만 현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오만으로 날아간 석 선장의 주치의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이국종 교수와 통화가 이뤄졌다.
석 선장의 상태가 어떤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회복이 불투명하고, 상태가 나쁘다”면서 “그러나 한국으로 데리고 가면 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로 그러느냐”고 묻자 이 교수의 대답은 명확했다.
“현재 석 선장은 외상 부위 감염이 크게 번지면서 패혈증이 생겼고 그 여파로 범발성 혈액 응고장애가 왔습니다. 우리나라 중환자실에서는 이런 중증환자 처치에 쓰는 첨단 의약품 사용 경험이 많고 최신 의료 장비도 잘 갖춰져 있지요. 석 선장을 한국으로 모시고 가면 해볼 만하다고 봐요.”
그리하여 석 선장의 ‘비행기 후송’은 극적으로 결정됐다. 이후 국내에서 다양한 첨단 중환자 의학이 동원되면서 이국종 교수의 예상대로 석 선장은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는 한국 중환자 의료 기술의 높은 수준이 담겨 있다.
고농도 혈소판 수혈
석 선장이 앓은 범발성 혈액 응고장애는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생기는 최악의 후유증이다. 신체 내부에서 출혈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수 있다. 당장 고농도(高濃度)의 혈소판 수혈이 긴급했다. 혈소판은 출혈이 생기는 곳에 달라붙어 피가 새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오만에서는 혈액제제 수급 미비로 혈소판 수혈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석 선장의 상태는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대병원에는 이런 응급환자에게 쏟아부을 혈소판 혈액 제제가 충분히 마련돼 있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끈 것이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자리의 상처가 아물려면 그 부위가 지혈이 잘 되고 진물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적절한 혈액응고가 이뤄지도록 해야 하는데 이때 ‘안티 트롬빈3’가 요긴하게 쓰였다. 이 약물은 혈액응고에 반드시 필요한 효소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낸다. 이 치료제를 투여하면서 석 선장의 범발성 응고 장애는 가닥이 잡혔다.
패혈증이 생기면 폐 전반에 염증이 생기면서 폐에 물이 찬다. 호흡곤란 증세가 온다. 이 때문에 선장은 인공호흡기 치료가 필요했다. 의료진은 이 같은 급성 폐 손상 치료에 효과가 뛰어난 ‘엘라스폴’을 긴급 투여했다. 이 약물은 폐 염증에 관여하는 단백질 활동을 차단하는 효과를 낸다. 예전에는 석 선장처럼 급성 호흡부전증이 생기면 절반 가까이 사망에 이르렀다. 하지만 ‘엘라스폴’이 수년 전부터 애용되면서 사망률이 10% 이하로 감소했다. 오만 현지 병원에는 이 약물이 비치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패혈증을 동반한 중증 외상 환자가 사망하는 최대 원인은 신진대사 노폐물을 걸러주는 신장(腎臟)이 급속히 망가지는 급성 신부전증 때문이다. 이럴 때 쓰는 비장의 무기가 24시간 지속성 신장 투석기이다. 일반적인 혈액 투석기는 환자의 굵은 동맥에서 전신의 피를 4~5시간 만에 대거 빼내 노폐물을 걸러주고 다시 넣어주는 방식이다. 만약 석 선장처럼 혈압이 떨어져 있는 중증 상태 환자에게 이 방식을 썼다가는 급격한 혈압 변화로 환자가 되레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진화된 인공호흡기
▲ 이국종 교수(오른쪽) 등 아주대병원 외상외과팀이 석 선장 복부봉합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photo 아주대병원
하지만 ‘24시간 지속성 투석기’는 온종일 혈액을 아주 천천히 빼내서 노폐물을 제거하고 돌려주는 방법이다. 이런 원리로 환자의 혈압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급성 신부전증을 치료할 수 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2년 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이 치료를 받았다. 전국의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이 투석기가 구비돼 있다. 다행히 석 선장의 신장은 급성 부전 상태로까지 악화하지 않았기에 ‘24시간 지속성 투석기’는 출동하지 않았다.
석 선장은 상당 기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었다. 여기에도 첨단 기술이 숨어 있다. 요즘 인공호흡기는 단순히 산소를 폐로 뿜어주는 기능을 넘어서 체내 산소 포화도와 폐 상태를 보면서 자유자재로 산소 압력과 농도를 조절해 쓸 수 있다. 이리하여 석 선장의 호흡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만약 급성 호흡부전증이 지속돼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허파꽈리를 펴주는 인공호흡기 치료술이 쓰인다. 호흡부전증 상태에서는 산소를 흡수하여 혈액에 전달하는 허파꽈리들이 찌그러진다. 바람 빠진 풍선 꼴이다. 이때 인공호흡기에서 산소를 뿜어주는 압력을 순간적으로 최대 2배 가까이 올려주면 바람 빠진 풍선이 펴지듯 허파꽈리들이 펴진다. 그러면 산소 흡수율이 올라가 체내 산소 포화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방법들도 국내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점점 사용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호흡부전증이 악화하면 최후의 수단이 동원된다. ‘인공폐(肺)’이다. 심폐기능이 완전히 손상돼 산소가 심장박동을 통해 돌지 못하는 단계가 되면, ‘체외 산소화 기기(ECMO)’를 이용할 수 있다.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내 기계가 여기에 산소를 입히고 나서, 다시 몸 안으로 넣어주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인공 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산소를 입힌 혈액을 몸에 다시 보낼 때는 마치 심장 박동하듯 압력을 주면서 밀어넣을 수도 있다.
무의식도 조절한다
석 선장은 치료받는 동안 의식이 없었다. 의료진이 일부러 재운 것이다. 다발성 외상으로 뼈가 부러져 있고 곳곳에 살갗이 벗겨져 있으면 환자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린다. 더욱이 인공호흡기 튜브가 기관지에 들어가 있으면 계속 사레 들린 것처럼 괴로워 견디기 어렵다. 이 때문에 수면효과를 내는 진정 치료가 필요하다. 석 선장도 그런 경우다. 환자가 잠자듯 편하게 숨을 쉬어야 인공호흡기 치료 효과도 좋아진다.
하지만 과도한 진정 치료는 혈압을 떨어뜨릴 수 있고 뇌 쪽에 병이 생겨도 모르고 넘길 수 있다. 따라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정도의 수준으로 무의식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진정치료의 핵심은 의식과 무(無)의식의 절묘한 줄타기이다. 진정제 용량을 절묘하게 조절하여 통증은 없애면서 가능한 한 병세에는 영향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이 고도의 기술이다. 때로는 진정제 투여량을 줄여서 의식회복 여부도 확인한다. 석 선장이 한때 의식을 잠시 찾은 것도 그런 배경이었다. 의료진은 석 선장 진정치료를 위해 수면제·진통제·근육이완제 등을 적절히 섞어 사용했다. 잠도 재우고, 통증도 줄이고, 몸을 편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다. 이런 복합 처방이 상승효과를 내면서 성공적인 진정 치료가 이뤄졌다.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혈압이 떨어지면 혈압상승제가 투여된다. 심장에서 나온 피는 혈압의 힘으로 뻗어나가면서 각 장기에 골고루 퍼진다. 혈압이 떨어지면 산소를 품은 혈액이 장기에 도달되지 않아 곧 신체 기능에 손상이 온다. 그런 상황이 오면 ‘노르에피네프린’ 계열의 강력한 혈압상승제가 이용된다. 이는 혈관 수축 관련 핵심 수용체를 직접 자극하는 약물이다. ‘혈압 호르몬’을 자극하여 혈관을 쥐어짜듯 혈압을 올리는 약제 ‘바소프레신’도 함께 사용된다. 혈압 강화를 위한 중환자 약물 처방들이다.
오만병원 초기 처치도 한몫
▲ 아주대병원 의료진이 방사선 조명장비를 통해 석 선장 수술 부위를 보고 있다. photo 아주대병원
석 선장이 비교적 빨리 회복세로 돌아선 데는 신속한 외상처치가 한몫했다. 선장을 오만에서부터 봐서 그의 몸 상태를 잘 아는 이국종 교수가 외상외과 전문의라는 점이 크게 도움이 됐다. 선장은 오른쪽 옆구리와 양쪽 허벅지에서 총알과 파편이 휘젓고 다녀 깊은 상처가 생겼다. 게다가 이곳이 감염돼 패혈증이 왔다.
이 교수는 석 선장을 처음 봤을 때 배와 다리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고 했다. 괴사성 근막염이 온 것이다. 근육을 싸는 근막과 주변 살이 세균에 감염되면서 주변으로 막 퍼져나가는 상태였다. 이어 근막 감염이 핏속으로 번져 패혈증까지 왔다. 이에 의료진은 석 선장을 국내에 데려오자마자 수술실로 바로 직행했다. 괴사성 근막염으로 너덜너덜해진 살과 근육을 쳐내기 위함이다. 외상외과 전문의들이 달려들어 고름을 퍼내고, 감염 부위를 잘라내고, 물로 씻어내고 봉합하면서 괴사성 근막염 기세가 꺾였다. 패혈증 발원지가 사라지면서 선장의 패혈증도 점차 줄어들 수 있었다.
상처 관리는 광범위 중증 외상 환자 치료에 변수다. 상처에 감염이 생기고 피부 재생이 늦어지면 피부가 짓무를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표피 재생을 촉진하는 ‘EGF 약물’이 이용되기도 한다. 피부에 스프레이 형태로 뿌려주는 신약도 개발됐다.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효과를 낸다.
외과는 물론 호흡기내과, 마취통증의학과, 정형외과 등 여러 진료과 의료진이 한꺼번에 달려든 것도 석 선장 회복에 큰 기여를 했다. 20여명의 의료진이 집중 치료를 하였기에 비교적 빨리 석 선장이 살아날 수 있었다. 정형외과 의사들은 총상으로 조각난 뼈들이 더는 어긋나지 않게 붙들어 매는 치료를 했고, 호흡기내과 의사들은 급성 호흡부전증 치료에 도움을 줬다.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수술 마취와 진정치료를 적절히 수행했다.
석 선장이 처음 총상을 입고 오만 현지 병원으로 이송됐을 때 그곳 의료진의 헌신도 석 선장이 최악의 경우로 빠지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다. 오만 의사들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여러 차례 복부 수술을 하고 총알과 파편을 초기에 제거해 그나마 석 선장이 생명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었다고 이국종 교수는 전했다. 통상 응급 환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등 응급실 전담 의료진이 맡는데 오만 병원에서는 처음부터 최고 베테랑 외과 의사들이 석 선장 총상을 치료해서 초기 처치가 비교적 잘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국 의료 기술에 힘입어 극적으로 회복한 석 선장은 앞으로 다리와 팔 골절 부위 수술을 몇 차례 더 받을 예정이다.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