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찾는 내몽골 대장정 (장수왕의 대군이 넘었던)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오지 않은 공간은 미리 겁낼 필요가 없다 - * 자세한 내용과 사진 지도가 실린 글이 {고구려연구] 7집에 나와 있음 기간: 1997년 8월 16일24일(8박 9일) 서길수(서경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서영수(단국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이사) 차 례 旅行 日程 2 8월 16일(토) 심양-장춘-우란호터 대흥안령으로 가는 길 3 8월 17일(일) 우란호터(烏蘭浩特) 잘 풀린 첫 만남 4 흥안맹의 수도 우란호터시 5 대흥안령산맥,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가름선 6 고성촌(古城村)의 조선족 7 고성촌 고성(古城)은 고구려성이다. 7 조선족 교장선생님의 산 증언 9 고려성에서 고구려와 같은 시대의 관인이 나왔다 9 공주령의 고려성(公主嶺古城) 11 백성시(白城市)의 고구려 집터(高麗房身) 12 8월 18일(월) 빠라커따이(巴拉克 ) 부근의 고구려 성들 소성자(小城子)는 고구려 성 16 단번에 찾은 허리에하다(赫列哈達) 고구려 성 18 밖으로 나와 주인을 기다리는 돌절구 19 고려영자(高麗營子)라는 곳이 있다 20 고려영자를 찾아서 21 8월 19일(화) 우란호터 - 색륜(索倫) - 수목구(樹木溝) 쓰룬(索倫)의 고려성을 찾아 27 고려성의 돌절구 29 징기스칸변장(邊墻)을 찾은 뜻은 30 징기스칸 변장의 실체 33 이어지는 변장 계속되는 천연 목장 33 대흥안령을 오르는 길 34 8월 20일(수) 대흥안령을 넘는다 시속 20㎞도 못 달리는 산길 36 한국보다 더 넓은 초원을 가진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37 몽골의 야생마에서 낙마 37 몽고 빠오는 관광상품으로 38 몽고인의 신혼생활 39 전통의상 입은 뽀임 뽀리커와 나른 치무그어 부부 40 양몰이는 말 대신 오토바이로 41 장수왕이 넘었을 대흥안령 41 지두우국의 중심지 오주목필기(烏珠穆泌旗) 42 소금못(鹽池)를 찾아서 43 염지를 찾은 뜻은 44 8월 21일(목) 날씨 맑음, 염지 - 서오주목필기 - 임동 중국 최대의 초원 실링고로 45 서오주목필기(西烏珠穆泌旗)의 정부 소재지 파언오랍호특진(巴彦烏拉浩特鎭) 46 고구려 성인가 아닌가, 서변장(西邊墻)을 찾아 47 동변장(東邊墻), 왜 쌓았을까? 48 요나라 경주성(慶州城)과 백탑 49 험난지로(險難之路) 행복지로(幸福之路) 50 8월 22일(금) 임동 -상경성 - 고구려 집터 - 요나라 조주성 - 임서 파림좌기의 중심지 임동 50 요나라 상경 터는 고구려 성이었는가 51 서쪽은 몽고인, 동쪽은 고구려인 52 읍소재지에 있는 당당한 박물관 53 고구려샘(高麗泉)을 찾아라 54 고구려인이 살던 터전 55 무엇 때문에 변장을 쌓았을까? 56 요나라 시조 야율라보기 능과 조주성(祖州城)을 찾아 57 요나라 조주성 57 계곡 안의 태조능 58 8월 23일(토) 임서 -고구려 마을 - 시라무렌강 - 홍산 - 적봉 고구려 마을, 고구려 강 59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을 건너서 적봉(赤峰)으로 61 홍산(紅山)문화와 하가점(夏家店)문화 61 8월 24일(일) 심양 - 서울 旅行 日程 8월16일(토) 서울(12:55) -CJ682- 瀋陽(13:30) 瀋陽(15:15) -特快127(西安-長春)- 長春(19:35) 長春(21:10) -游259- 烏蘭浩特(05:59) 8월17일(일) 오전 吉林省 白城市 平安鎭鄕 平安村 南 15㎞ 高麗房身遺址 三甲村 兩果樹屯 서쪽 오후 烏蘭哈達鄕 古城村 高麗城 8월 18일(월) 烏蘭浩特 -30- 察爾森 -59- 好仁鄕 -19- 索倫 錫伯城, 高麗城, 赫列哈達 古城, 特 沙 古城 8월 19일(화) 烏蘭浩特 -40- 歸流河 -30-大石寨 -41- 阿力德爾 -24- 樹木溝 -46- 桃合木- 44- 軍馬場 - 62- 哈拉盖圖 -41- 白音胡碩(총 328) 8월 20일(수) 白音胡碩-35-烏拉盖-32-道特諾爾-40-寶力格-61-東烏珠穆泌旗(총 168) 東烏珠穆泌旗(烏里雅斯太)-13-西日葉東-31-鹽池-44-東烏珠穆泌旗(총88) 東烏珠穆泌旗-64-布日吐大隊-18-柴達木-20-烏珠穆泌旗(巴彦烏拉浩特)(102) (총 358) 8월 21일(목) 西烏珠穆泌旗 -32- 巴音寶力格 - 16- 大水波羅牧場 -17+10- -28- 九連庄 -24- 廟西營子 -19- 白塔子 - 16- 巴根吐(총 162) 九連庄 - 烏牛台溝門 - 蒙古營子 - 老房身 - 西邊墻 五十家子鎭 - 西石門子 - 東邊墻 - 海日其格 - 榮生 榮生 - 海日其格 - 朝陽 -索博日 (白塔子) / 高麗艾勒 白塔 遼 慶州城 遺址 遼 慶陵 索博日 (白塔子) - 輝騰高勒 - 駱駝井子 - 駱駝井子上營子 輝騰高勒 - 巴根吐 -常興二隊 索博日 (白塔子) -32- 崗根(浩特艾勒?) -27- 古魯滿汗 -44- 巴林左旗(林東)(총 103) 8월 22일(금) 遼 上京城 遺址 遼 祖州城 遺址 遼 太祖陵 后召廟遼石窟寺 觀光 巴林左旗(林東) - 83- 巴林右旗 -38- 巴林橋(시라무렌강) -11- 五分地 -17- 頭分地 -34- 翁牛特旗(烏丹) - 34- 蠻子墳 -25- 焦家營子 -30(?)- 赤峰(272) 8월23일(토) 赤峰 觀光 赤峰 出發(20:18) -特快207ㅡ 8월 24일(일) - 瀋陽驛 到着 (06:36) 瀋陽(12:10) -KE860 - 서울(14:55) 8월 16일(토) 심양-장춘-우란호터 대흥안령으로 가는 길 서울발 심양행 북방항공 CJ682가 예정보다 약 10분 늦게 넓은 요동벌에 길게 놓여있는 도선(桃仙)공항에 사뿐히 내렸다. 부친 짐이 없고 비행기 앞 좌석에 앉은 덕분에 빨리 공항을 빠져 나왔다. '오랫만이다' 1994년 10월 마지막 찾아왔던 요동땅에 3년 만에 다시 온 것이다. 마치 옛날 일터를 돌아온 것처럼 힘이 솟는다. 진즉 왔어야 했는데, 괜히 뜸들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지 않은 공간은 미리 겁낼 필요가 없다' 두 달 전에 결혼했다는 리 리앙이 기차표를 사가지고 새색시와 함께 마중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아 준다. 미리 수배해 놓은 자가용 차를 타고 시내를 들어오는데 고속도로를 통하지 않고 구도로를 달린다. 옛날 요양 갈 때 갔던 길이다. 십리하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는데 운전사가 '고속도로란 실제로는 돈만 들어가지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양 북역에 내려 요구하는 차비는 택시비의 3분의 1인 50원(약 5000원)이다. 리 리앙 부부도 입장권을 사서 함께 입장하였다. 장춘까지 좌석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열차 차장하고 직접 부딪쳐 침대차 자리를 구해 주겠다는 것이다. 열차에 도착해 여기저기 얘기하더니 담당자에게 부탁을 했다며 내려간다. 같이 차 한 잔 할 틈도 없이 열차는 떠난다. 편안하게 침대에 누어 가며 서 교수와 함께 앞으로의 여정을 논의하기도 하고, 내몽고가 고향이라는 같은 방 젊은이와 한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장춘에도 류 밍후이 부부가 우란호터행 열차표를 사가지고 나와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고급인 특쾌열차가 1시간이나 연착한 통에 장춘에서 류씨 부부와 함께 괜찮은 저녁식사라도 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서둘러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 9시 10분 출발 내몽고행 열차를 탔다. 계획을 짤 때 내몽고 우란호터로 가는 길을 다각적으로 검토한 결과 심양-장춘-우란호터 코스가 가장 알맞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거리로 따지면 사평→백성을 거치는 것이 가장 가깝지만, 밤 12시에 백성에 도착하면 활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정시에 출발한 관광열차(游)는 모두 침대칸인데 연석이 없고 경석 뿐이다. 원래 관광열차는 중국에서 최고급 열차인데 연석이 없다는 것이 좀 이상하였지만, 목적지가 큰 도시가 아니라 비싼 요금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열차는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열심히 달리고 우리는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8월 17일(일) 우란호터(烏蘭浩特)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그런데 잘 자다가 기차가 서면 잠이 깬다. 흔히 기차가 달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것으로 생각하지만 계속해서 나는 소리는 오히려 자장가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 차가 역에 들어서서 오랫동안 정차하면서 정적이 이어지면 그 때 잠이 깨는 것이다. 마치 강의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자장가 삼아 잘 자던 학생이 선생님 말씀이 끊어지고 조용해지면 잠을 깨는 것과 같은 이치인 모양이다. 5시쯤 일어나 밖을 내다본다. 낮은 산들이 가끔 있는 벌판을 달린다. 옥수수, 해바라기, 들판에 숲을 이룬 포플러들, 여니 만주벌판과 같은 풍경이다. 5시 10분, 위동(衛東)이란 역을 지나간다. "야, 옛날 이런 땅이 모두 우리 땅이었다니!" 서영수 교수가 조용히 감탄의 소리를 내뱉는다. 조금 가니 벼농사를 짓는 논이 끝없이 펼쳐진다. 옛날에는 논이 있는 곳은 틀림없이 조선족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인들도 물대기 좋은 곳에서는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 데다 이제는 만주 전역의 주식이 쌀로 바뀔 정도로 일반화 되 버려 논만 보고 조선족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다. 1875년쯤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선족들이 처음 벼를 심기 시작해 만주의 식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기차는 흥안령산맥 쪽으로 계속 달리면서 점차 산지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지나치는 경치를 한 참 바라보니 무언가 만주의 다른 지방과는 분명히 다른 감이 들기 시작한다.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이다. 초록색으로 덮여있어 별 생각 없이 바라보았는데 가도가도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민둥산에는 마치 골프장에 잔디를 조성해 놓은 것처럼 빠짐없이 푸른색으로 덮여 있다. '아, 이것이 바로 초원이로구나" 이런 초원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차가 천천히 도시로 들어서더니 예정시간보다 일찍 목적지인 우란호터에 도착한 것이다. 잘 풀린 첫 만남 드디어 내몽골에 도착하였다. 이른 새벽이지만 열차가 도착한 역전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탈것들이 손님을 부르느라 시끌벅적하다. 이곳에는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택시를 만든 것이 특히 많다. [서길수 교수] 하얀 종이에 한글로 쓴 내 이름이 눈에 띈다. 생전 처음 발을 딛는 내몽골에서 내 이름을, 그것도 한글로 쓴 것을 본다는 것은 보통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내몽골에서 이런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집 안방에서 직통으로 걸 수 있는 편리한 국제전화 덕분이다. 한국에서 몽골 전문가인 강원대의 주체혁 교수로부터 내몽골대학의 최동진 교수를 소개받고, 최교수는 다시 우란호터의 제3조선족중학교 정수택 교장선생님을 소개한다. 오늘 마중 나온 분들은 북경에 간 정 교장 대신 나온 흥안맹 교학연구실의 현철호 선생과 중학교의 두 주임선생님 들이다. 학교 차인 북경212 짚차를 타고 우선 흥안빈관으로 가서 잠자리부터 마련한 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현 선생님이 며칠간 안내를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로서는 처음 오는 낯선 곳이라 현지 사정에 밝은 안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 어렵게 운을 떼었다. "그렇게 하시죠" 너무 쉽게 대답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현 선생을 만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1936년 생인 현 선생은 내몽고 사범학교를 나와 조선중학교에서 20년간이나 지리를 가르치다 교수법을 연구하여 지도하는 교학연구실에서 계속 근무하였기 때문에 우선 학술적으로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교수법 지도 때문에 여러 지역을 다녔기 때문에 현장경험이 풍부한 분이었다. 그런데다 작년 정년퇴임을 하여 시간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마치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기막힌 만남이었다. 흥안맹의 수도 우란호터시 중국을 10년 이상 여행하여 '중국통'이라는 말을 듣는 필자도 내몽골에 들어오니 낯선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맹(盟)이니 기(旗)니 하는 행정구역에서부터 '쓰무' '아이리' 등 듣지 못한 용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행을 하기 전 우선 이런 몽고말부터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자치주(州) - 성(省), 직할시와 맞먹는다.(예: 내몽고자치주) 멍(盟) - 큰 시(예: 흥안맹(興安盟) 치(旗) - 현(縣). 한국의 군(郡)에 해당된다. <예: 과이필우익전기(科爾泌右翼前旗)> 호터(浩特) - 현(縣)급 시(市)를 말하는데 몽고어로 성(城)을 뜻한다. (예) 우란호터(烏蘭浩特) 쓰무(蘇木) - 향(鄕). 한국의 면 단위에 해당된다. 누트어커(努特克) - 구(區), 지구(地區) 가차( 査) - 촌(村). 한국의 마을(里)에 해당된다. 아이리(艾里) - 둔(屯). 한국의 자연부락에 해당된다. 우란호터가 속한 흥안맹은 내몽고자치주의 동북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흑룡강성과 길림성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 몽골(외몽골)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이 5만 9000여 ㎢로 남한의 3분의 2에 가깝지만 인구는 200만이 안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그 가운데 몽고인이 약 35%를 차지한다. 이처럼 몽고인의 비율이 작은 것은 해방이후 이민정책을 장려해 중국인(한족)이 대거 유입했기 때문이다. 1933년 내몽고 인구가 450만이었는데 1984년 1955만으로 4배 이상 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중국인구지리간편}, 중경출판사). 흥안맹은 산지나 구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서북쪽은 대흥안령 산지라 지세가 높고, 동쪽은 눈강(嫩江) 우안의 충적평원이고, 남쪽은 낮은 산과 구릉이 많기 때문에 낮다. 가장 높은 곳은 대흥안령의 1711.8m이다. 우란호터시는 흥안맹의 맹정부가 있는 소재지로, 865.15 ㎢의 면적(시구 면적은 16.5㎢)에 인구 24만 500명(市區 인구 17만 3400명)으로 내몽고에서는 중형 도시에 속한다. 내몽고자치주라고 하지만 몽고인은 5만 4000여 명으로 중국의 한족 17만 명에 비하면 22.5%밖에 안 된다. 기타 소수민족 15만 6000여 명 가운데 조선족이 7000여 명으로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데 실제로는 10,000여 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내몽고 전체 20,000여명의 조선족 가운데 거의 절반이 이곳에 있고, 내몽고에서 유일한 조선족 고등학교도 이곳에 있다는 점에서 보면 우란호터시는 내몽고의 조선족 센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란호터시는 처음 왕야묘(王爺廟)라고 했는데 해방 후인 1947년 현제의 이름인 우란호터로 바뀌었다. [우란]이란 몽고 말로 붉은색을 뜻하기 때문에 붉은 시(성)란 의미를 갖는다. 중국에서 제일 먼저 소수민족 자치구가 된 내몽고자치주가 바로 이 도시에서 탄생하였고, 1986년 비교적 일찍 개방도시가 되었다. 대흥안령산맥,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가름선 우란호터시는 대흥한령산맥의 남쪽 기슭으로 흥안령으로 들어가는 첫도시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흥안령산맥은 흑룡강 남쪽 가에서 남남서를 달려, 몽고 고원과 동북 대평원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다. 백악기(白堊紀)에서 제3기에 걸친 조산운동(造山運動)으로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산맥으로, 수성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과거의 준평원면으로 여겨지는 평탄면을 가지는 완만한 지형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산맥의 높이가 800∼1200m 내외이고, 1200∼1700m 높이의 잔구(殘丘, 준평원 위에 홀로 남아있는 언덕을 일컫는 지리학 용어. 주위의 땅이 낮아짐으로 인해 생긴다)형 봉우리가 많다. 서남으로 이어지는 길이는 약 1,000㎞(1500㎞라는 자료도 있다)이고 남북의 너비는 약 300㎞나 된다. 산맥의 동남쪽은 비교적 험준한 곳이 있는 반면에 서북쪽은 평탄한 편이다. 동남쪽은 동해의 영향으로 년 강수량이 400㎜가 넘지만 서북면은 내륙과 접하고 있어 400㎜ 이하로 강수량이 극히 적은 편이다. 대체로 낙엽송 자작나무 등 수림으로 덮여, 북부 산지를 중심으로 계획적인 삼림 벌채와 식림이 추진되고 있다. 산맥의 중악부에 삔조우철도(濱州鐵道)가 횡단하고, 꼬우코우(溝口) 야커스(牙克石)에서 각각 남북으로 산림철도가 나누어 이어진다. 북부에는 소수의 오로춘족이 분포하여 수렵 목축을 생업으로 하면서 이동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북단부에서 흑룡강 연안을 따라 그 분맥인 소흥안령산맥이 달린다.역사적으로 볼 때 이 대흥안령산맥은 동이와 북적을 나누는 큰 맥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란호터시는 이미 대흥안령산맥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흥안령의 특색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해발 300m 전후의 높이에 주위가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와 비슷하고 흥안령과 마찬가지로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다. 도시의 서쪽에는 조아하( 兒河)가 동쪽에는 귀류하(歸流河)가 흘러 시의 남쪽에서 합류하고 있어 시의 젖줄을 이루고 있다. 년 평균 기온이 4.2도, 최저기온 영하 33.9도, 최고기온 39.9도로 기온차가 74도에 가깝다는 것은 사람이 살기에 그다지 알맞은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내에 큰 강철공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된 산업은 농업과 목축업이라고 할 수 있다. 벼, 옥수수 등을 생산하는 농경지가 26만 무(畝), 소와 양을 치는 목초지가 25만 무로 비슷하다. 근년에는 인공조림도 많이 하여 나무숲도 늘어가고 있다. 나무가 있는 땅 1만 8000 무 가운데 1만 7000 무가 인공조림지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성촌(古城村)의 조선족 호텔 수속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곳은 아직도 외국인 두 배의 값이 통용된다.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내외국인의 차이를 없앤다고 발표했고, 비행기와 기차비는 이미 평준화가 되었는데, 그 법령이 아직 흥안령까지는 미치지 못 한 것 같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우리가 방에 짐을 넣고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현 선생은 차를 구하러 역전으로 갔다. 이곳 택시들은 모두 역전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8시 30분 출발. 이제부터는 몇 년간 자료로만 보고, 글로만 연구했던 고구려 관계 유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거다. 앞으로 나오는 '고려'는 모두 '고구려'를 뜻한다. 고구려 때는 자신을 고려라고 불렀다는 것이 당시 제작된 불상이나 고구려 중원비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뒤에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기 위해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고려'라고 한 것을 보아도 고구려가 고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는 백성시(白城市)에 있는 고려집터(高麗房身)를 맨 먼저 보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현 선생이 고성촌을 잘 안다고 해서 우선 아는 곳부터 가기로 했다. 백성에 가기로 하고 200원(한국 돈 약 20000원)에 빌렸다는 빵택시(우리나라 다마스 같은 택시인데 식빵같이 생겼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빵택시라고 한다.)는 역전 대로인 우란서대가, 우란동대가를 가로 질러 동쪽으로 달리다 조아하( 兒河)를 건넌다. 다리 건너 조금 가니 관점(關店)이란 마을에서 왼쪽으로 꺾어 통해공로(通海公路)로 들어서 북쪽으로 곧장 달린다. 고성촌 고성(古城)은 고구려성이다. 우리가 우란호터에서 고구려 성터를 찾기로 한 것은 1933년 러시아의 고고학자 K. A. 렐리졔프(熱列玆雅科夫)가 이 지방을 조사하고 고구려 성이 있다고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1933년 가을 나는 철리목맹(哲里木盟) 찰살극오왕(札薩克圖王)의 영지에 갈 기회가 생겨 흥안성의 동부와 남부 지방을 고찰하였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이 비방에는 전부터 서로 다른 부락들이 살아왔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화목한 곳도 있고, 호전적인 부락은 외지의 침입을 받았다. 침입해온 집단은 통치자가 되기도하고 피정복자가 되어 귀순하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전쟁에서 패배해 점령했던 지방에서 쫒겨나기도 했다. 이 지방에서 맨 마지막 통치자가 된 것은 몽골인이다. 모든 사라진 민족들도 자기 민족의 문화유적은 남아있다. 내가 기록한 이러한 고적들, 즉 옛날의 거주민들이 증언이 노인들을 통해서 전해내려 와 알려진 일련의 고적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전문 고고학 문헌 가운데 나온 것도 있다. 이런 유지 가운데 金蛙鎭이 있다. 金蛙鎭은 公主嶺(小王爺의 大本營) 부근에 있는데 王爺廟 북쪽 15-18㎞ 지점에 있는 兒河 왼쪽 가에 있다. 두 번째 저명한 고성유지가 있는데 바로 동성문물연구회 회원인 B. B. 빠오누스푸(包諾索夫)가 1927년에 고찰한 [錫伯城]이다. 그는 연구회가 파견하여 현지에 가서 전문적으로 고찰하였다. 이 유지는 南 동북 13㎞, 兒河 왼쪽 가의 長石家子村(지금의 城四家子일 가능성이 크다)에 위치한다. 나는 직접 이 성가운데 첫 번째 것을 답사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새로운 자료를 얻지 못했다. 두 번째 성터의 답사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다만 현지 주민들로부터 '옛날 여기는 高麗人의 城'이라는 말을 들었다. 성은 아직도 성벽의 남은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데 각 면마다 모두 길이가 몇 리(중국 화리는 500m)씩 된다. 성 안의 밭에서 재갈(馬銜), 편자(馬蹄)와 기타 유물들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금와진은 오늘날 우란호터시의 북쪽에 있는 전공주능(前公主陵)으로 보인다. 王爺廟가 지금의 우란호터시이고 시에서 북으로 15-18㎞ 지점이며, 지금도 존재하는 공주령 부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고고학자는 이곳 답사를 실패했다고 한다. 바로 그 부분을 우리가 보강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근에 고려성이라는 고성이 있다는 기록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고성촌은 조아하( 兒河) 동쪽 가에 있는데 우란호터시 북쪽 약 10㎞ 지점에 있고 흥안맹(興安盟) 오란호특시(烏蘭浩特市) 오란하달향(烏蘭哈達鄕)에 속한다. 이 마을은 뒤편에 옛성터가 있기 때문에 고성촌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현지 몽고족 노인들은 이 고성을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부른다. 몽고족 노인들의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아주 먼 옛날에 이 성는 조선인이 살던 성이라고 한다.(내몽고조선족연구회편, {내몽고조선족}, 내몽고대학출판사,1995, 124쪽) 만일 대흥안령산맥에 고구려 성이 있다면 이것은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실이요, 고구려의 지도가 바뀌어야 하는 엄청난 발견이기 때문에 현 선생으로부터 분명히 성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벼가 심어진 논 가운데를 가르며 계속되는 비포장도로를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꺾어 시골길로 들어선다. 현 선생은 마치 자기 동네를 찾아가듯이 쉽고 자세하게 안내를 해 고성촌소학교 앞에서 차를 세운다. 여기가 고성촌이고 학교도 고성촌소학교인 것이다. 성은 바로 소학교 북쪽 담과 접해 있었다. 성 입구에 [시 지정 문화재 보호구역(市重點文物單位)]이라는 콩크리트 표지판이 서있고, 표지판 왼쪽으로 성벽을 잘라 밭으로 일구고 있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으며, 소학교와 맞붙어있는 성벽 안쪽으로는 성 건너편에 있는 고성촌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잘린 부분을 재 보니 아직도 2.5m 높이에 15m 정도의 너비로 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옹성부분은 분명하지 않지만 치성(雉城, 중국에서는 馬面이라고 한다)은 아직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 치성의 원조가 바로 고구려의 성이 아닌가. 이 성이 비록 고구려 때 축성한 것이 아니라 해도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길가 동쪽 치성은 동네 사람들이 흙을 파다 써버려 회손이 심한 반면 북쪽 성벽에는 약 70-80m 간격으로 3개의 치성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현 선생이 성 안의 밭이 10향( )지기라고 한다. 1향이 1000㎡이니 10000㎡인 것이다. 우리 나라 평수로 약 3000평 정도이고 한 변의 길이가 약 300m 정도가 된다. 나팔꽃 비슷한데 키가 10㎝ 정도밖에 되지 않아 줄기가 길게 감고 가는 나팔꽃과 달라 마침 양을 치고 있는 중국인 목동에게 물어보니 사발꽃(碗花)이라고 하는데 조선족에게 물어보니 나팔꽃이라고 한다. 기후조건이 좋지 않아 줄기가 자라지 않지만 끈질기게 자라 작지만 비슷한 꽃을 피우는 것을 보니 마치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민족의 기상을 잃지 않고 사는 조선족의 강인한 정신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서쪽 성벽을 둘러보고 바로 이어져 있는 고성촌에서 물이라도 얻어먹고 가기로 하였다. 현 선생은 소학교 교장선생님이 이 근방에 산다며 동네로 들어가 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묻는다. 현 선생은 물론 그 할아버지와도 아는 사이이다. 하두 오랜만에 와 보기 때문에 현 선생도 오락가락 한다고 한다. 길을 잘 못 들어 옥수수 밭으로 질러 한 집을 찾아가니 노부부가 반갑게 맞아준다. 조선족 교장선생님의 산 증언 현선생보다 한 살 위이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한 손춘산 선생은 1954년 조선족들이 이곳으로 처음 이주해 올 때 20세의 청년으로 와서 지금까지 45년간 후학을 가르치는데 일생을 바친 교육자이다. 4살 아래인 정연옥 선생도 함께 교사로서 삶을 살았는데 정 선생은 지금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담배는 뗏습니다(끊었습니다)" 성장한 자식들은 도회지에 나가고 두 부부만 사는 교장선생님은 건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나이가 드니 옛날 같지 않은 모양이다. 감기 때문에 몸져 누어 계시던 교장선생님이 고성에 대한 얘기가 시작되자 아픈 것도 잊은 듯 청산유수다. 우리는 사모님이 펌프를 틀어 길러다 준 시원하고 정말 맛이 있는 냉수를 마시며 터줏대감 손 교장선생님의 역사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 조선족들이 우란하따쓰무(烏蘭哈達蘇木) 고성촌인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은 1954년, 이곳에 조선족 농장이 생기면서부터이다. 지금은 96호 486명이 사는 큰 동네이지만 당시는 몽고족이 사는 집 두 채만 있었는데 몽고족들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길세를 받던 곳이라고 한다. 하나 제미있는 것은 길세를 받던 두 집 가운데 한 집이 바로 교장선생님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라는 것이다. 또 96호에는 몽고족 2호와 중국인 2호가 함께 살고 있는데 모두 조선말을 잘하고, 아이들도 모두 조선말로 가르치는 조선족소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조선족들이라고는 하지만 현지 기후에 맞게 흙집을 많이 짓고 있다. 흙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기 때문이다. 주위의 논밭은 대부분 조선족들의 땅인데 유독 성 안의 10향은 몽고족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고성촌에서 같은 크기의 다른 밭과 바꾸자고 제안했으나 몽고족들이 응하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성에서 고구려와 같은 시대의 관인이 나왔다 "고성은 고려성이다" 옛날부터 몽고족들에게 내려온 말인데, 왜 그런지 설명은 불가능하다. 하여튼 성 안 밭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동기, 기와, 자기, 제사 놋그릇, 촛대 등.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큰 관인이 나왔다. 600년대 동호시대 것이다. 내몽고 역사계 아니면 연변대에서 가져갔다." 는 말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일으켰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성의 축성연대가 고구려 시대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동네 밖에서 백은으로 된 관인이 나왔는데 중앙에서 가져갔다. 찾은 사람이 북경에 가서 연고권을 주장하는라 소송까지 냈는데, 국가가 하는 일인데 되는가!" 최근에는 이런 유물이 돈이 된다고 해서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동전 하나만 주어도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잘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 교정선생님은 또 하나의 확실한 물증을 보여 준다. 성 안 밭에서 나온 돌절구인데 얼마 안 되는 돈을 주고 사서 쓰고 있다며 부엌에 있는 현물을 보여 주는 것이다. 큰 조선식 솥 옆에 돌절구를 아예 붙박이로 고정시켜 놓은 돌절구를 보자 뭔가 확신같은 것이 떠올랐다. 이런 돌절구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의 여러 산성에서도, 유하의 나통산성에서도, 길림의 용담산성에서도, 무순의 고이산성에서도 보았던 돌절구이다. 고구려 연구자들은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로부터 현제 중국인 학자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유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절구를 만난 필자의 기쁨은 남다른 것이었다. 유목민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무거운 돌절구를 메고 다닐 필요도 없다. 돌절구는 일찍이 벼를 심어 먹던 고구려의 필수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유물이 유실되지 않고 조선족이 보관 사용하고 있고, 또 고성촌이 조선족 마을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조금 가면 부여현이 있는데, 거기서 주몽이 내려가 집안에서 고구려가 성립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부여와 고구려에 대한 역사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사모님은 차를 끓여오고 과일을 가져오는 등 대접에 바쁜데 우리는 교장선생님의 이야기 대접 이상 더 큰 것이 없다. 교장선생님의 대접 가운데 가장 큰 대접은 이 고성촌 말고도 가까운 곳에 고성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고성보다 더 큰 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현 선생에게 가는 길을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 돌아오는 길은 성 안을 통과하는 남쪽 길을 택해서 걸어 나오며 성의 구조를 답사하였다. 도중에 외지에 갔다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한다. "개성에 갔다 온다" 는 할머니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피부가 고왔다. "개성이 어디인데요" 하고 물어보니 멀리 남쪽에 보이는 우란호터시를 가리킨다. 우란호터시가 왜 [개성]인가라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가성(街城)이란 중국말로 읍내란 뜻인데 우리식 발음으로 개성이 된 것이다. 여기서는 읍내 장보러 가는 것을 개성에 간다고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장날이나 되어야 개성에 가는데 요즈음은 학교 다니는 손자 때문에 자주 다닌다고 한다. 경상북도 영일이 고향이라는 할머니는 만주로 온 뒤 길림성 반석에서 살다 백성을 거쳐 이곳으로 흘러왔다는데,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반가워하면서도 흔히 조선족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 조차 하지 않는다. 가을 하늘 처럼 맑은 인상을 가진 할머니는 고향을 등지고 먼 땅에서 어렵게 옮겨다닌 삶을 담담하게 털어놓은 달관된 자세를 보여주어 선입관을 가지고 본 나그네가 오히려 쓸데없이 가슴아파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령의 고려성(公主嶺古城) 고성촌을 떠난 빵택시는 다시 아까 들어왔던 큰길로 나와 시내쪽으로 조금 되돌아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다. 벼를 심은 논이 계속되면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한 관계시설이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수로 옆에는 제법 널직한 길이 계속된다. 가끔 농사짓는 농부나 고기잡는 젊은이들이 보이지만 동네도 보이지 않은 길이 한참 계속되더니 그리 높지는 않지만 당당한 산이 나타난다. 여기가 전공주능(前公主嶺)이란 마을이다. 여기서 언덕을 넘어가면 후공주령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 왼쪽에 성이 있다. 동네를 지나자마자 실개천이 흐르고, 개천 너머 눈앞에 펼쳐진 경치는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8월 말인데도 가을처럼 높고 파란 하늘에는 세털구름이 적당히 떠 있어 깨끝하고 가벼운 윗부분을 칠하고, 그 밑에 엷은 초록색으로 초원의 잔디밭을 그려 밑그림을 만든 뒤, 왼쪽에 낮으막하지만 구도가 꽉 차도록 오밀조밀한 산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스라이 공주령을 넘어가는 언덕 위에 기울지 않을만큼 제법 큰 나무 한 그루가, 딱 한 그루의 나무가 무게를 잡고 있다. 산성은 바로 이러한 경치의 왼쪽 아래 튀어나오지 않으나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선지 개울을 건너다 돌을 잘 못 밟은 서교수가 넘어지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다행이 큰 문제는 없었다. 개울을 건너자 마자 문화재보호 표지판이 서있는데 잘 보존되지 않고 회손되어 있다. 표지판에서 왼쪽으로 가면 성 안 밭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있다. 성의 동남모서리에 올라서 전체를 바라보니 고성보다는 몇배 크고 안에 내성이 있는 대규모 성이었다. 산을 등지고 쌓았지만 평지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토성이다. 남쪽 성벽은 낮지만 형태는 분명하고 서남 모서리 부순이 삼각형으로 짤려 물이 흘러내리는 냇가로 변하였고, 동쪽 성벽은 두군데 치성형태가 완연하지만 많이 파손외었다. 성안으로 들어가 내성 동쪽벽을 따라 가면서 밭을 뒤져보니 기왓장이 많은데, 연대가 고대까지 올라가지 않은 것 같았으나 좀 파들어 가면 그 이전 시대의 유물도 많을 것으로 본다. 북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치성도 두 군데 분명하게 남아 있다. 서북 모서리에 선 나는 여러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쪽 성벽이 분명히 있어 성이 끝났는데도 북벽은 계속되어 있었다. 아마 달아낸 성으로 보이는데 그 규모가 작지 않다. 100여 미터 이상 달아냈는데 치성까지도 부명하게 설치했고 서북모서리는 완만히 굽어 서벽을 이루고 있는데 20-30 미터 가다가 끊겨 있다. 달아낸 성을 보고 되짚어 오는데 서북모서리에 판축을 한 부분이 마치 축성법을 보란 듯이 드러내 놓고 있어 힘들이지 않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앞에서 본 러시아 고고학자 렐리졔프가 답사에 실패한 공주령 부근의 성이 바로 이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렐리졔프의 보고서에 보면 공주령을 '소왕야(小王爺)의 대본영'이라고 했는데, 이 성은 그 규모로 보아 이 근방 전체를 다스리는 본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 성에서 서남쪽으로 5㎞ 정도 거리에 아침에 다녀온 고성이 있어 이 본영에 딸린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를 타고 오느라고 멀리 돌아서 왔지만 직선 거리로 보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은 비포장도로라 빵택시가 몹시 흔들렸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이 가볍고 즐거웠다. 어렵지 않게 뜻밖의 성과들을 올렸기 때문이다. 1시 쯤 개성으로 돌아와 조선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김치는 너무 짰지만 탕수육과 비슷한 요리는 맛이 있었다. 백성시(白城市)의 고구려 집터(高麗房身) 2시 30분 시내를 떠난 빵택시는 조아하( 兒河) 다리에서 잠깐 서서 강을 찍었다. 소, 당나귀 인간들이 모두 여기서 씻고 놀고 한다. 다리 건너는 데는 5원씩을 낸다. 포플러 가로수가 시원한 직선 아스팔트길을 빵택시는 신나게 달린다. 정말 특이한 전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어쩌면 산들이 그렇게 이발한 것처럼 나무가 없고 10센티도 안되는 초록색 풀들이 덮여 있을까? 가끔 건축용 흙을 채취하기 위해 파낸 곳을 보니 모두 바위산들이나 흙이 있어도 자갈들로 가득하다. 유일한 나무들이 포플러인데 모두 몇 십년 내에 조립한 것이기 때문에 원래는 나무가 없는 초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시간 뒤 백성시(白城市) 평안(平安)에 도착하였다. 생각보다 멀다. 우리가 이처럼 평안이란 곳을 찾아온 것은 백성시 문물지에 이곳에 고구려 집터(高麗房身)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집터(高麗房身) 옛터는 평안진향 평안촌 남쪽 1.5㎞ 지점인데, 삼갑촌(三甲村) 양과수둔(兩果樹屯) 서쪽과 마가와보(馬家窩堡) 사묘(寺廟)터 사이에 계절하(季節河, 비가 오면 하천이 되고 평소에는 말라있는 곳)가 있어 서로 떨어져 있다. 옛터는 대략 긴네모꼴로 동서 길 600m, 남북 너비 300m이데, 땅 표면에 대량으이 건축재료와 약간의 도기, 자기 조각이 널려 있다. 건축재료는 파란 벽돌, 베무늬기와, 암기와, 숫기와, 그물무늬기와 구적(勾滴???)이나 건축부재 등이 많다. …고려집터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당지의 견해들이 다른데 모두 선조들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들이다. 요나라가 발해를 물리친 뒤 말갈인과 고구려 사람들을 대거 서쪽으로 옮겼는데 그 뒤 현지인 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일컬어 고려(高麗)라고 했다. 이 이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백성문물지} 17∼18쪽)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앞으로 [고려성], [고려집터], [고려마을] 등 [고려] 즉 [고구려]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는 우선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고구려 때 이 곳은 고구려 땅이었고 당시 고구려가 쌓은 성이나 주거지다. 2. 위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원래 고구려의 후예였던 발해인들이 요나라에 멸망한 뒤 집단으로 이주한 뒤 살았던 주거지다. 그러나 이 경우 [고려성]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고구려사와 주변 국가와의 관계사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는 이 문제를 푸는 열쇠를 찾는 방향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만일 이곳이 고구려 땅이었다면 고구려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중대한 사실이요, 발해의 후예들에 대한 유적이라 하더라도 [발해인 = 고구려 후예]라는 사실을 증명해 줌과 동시에 발해 멸망 후 발해인들의 행적을 찾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인 것이다. 자, 이제는 고구려 집터를 찾아 나서자. 우선 양과수둔이라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평안에서 남쪽으로 가다 얼마 안가 왼쪽으로 꺾어 심하게 털걱거리는 비포장길을 얼마쯤 가니 양과수(兩果樹)라는 마을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 동네 사람들에게 고리빵썬(高麗房身)을 물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양과수 서쪽에 있는 마가와보 절터 사이에 있는 것이라며 다시 주민들과 상의해 보았으나, 동네 서쪽에 그런 절터도 없고, 가장 가까운 서쪽 동네는 신합둔(新合屯)이라고 한다. 어쨋든 신합둔으로 가 보자. 양과수 입구에서 오른쪽(서쪽)으로 빠져나가니 큰길이 나온다. 큰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가니 [국가급 농업종합개발항목, 길림성 송요평야 농업종합개발27202I??]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나오고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거기서 한참을 가서야 신합둔에 닿는다. 많지 않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 82세 할아버지가 여기 토박이라는데 머리를 가로졌는다. 도대체 엄청나게 큰 농장 가운데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농업개발구가 되면서 모두 밭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정확하게 지적해 주지 않는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포기하고 돌아오며 개발지구 표지판을 찍었다. 이 큰 농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표지판을 출발하여 돌아가는데 운전수가 착각하여 아까 온 길 보다 한 단지 앞에서 오른쪽으 꺾어 들어섰다. 크고 바둑판처럼 만들어 놓은 길이라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실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전조였던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왼쪽이 불쑥 솟은 무덤같은 곳이 있고 50여 미터 쯤 푹 파인 곳이 있다. 고분같다는 생각이 들어 차를 세우고, 마침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다가가 그 구덩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몹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모래 파내는 구덩이라는 것이다. "혹시 이 근방에 고고학발굴을 한 곳이 있습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운전사가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아저씨가 결정적인 제보를 한다. 자기 어렸을 때 자기 집 밭에서 유물을 캐냈다는 것이다. 이건 대단한 횡재다. 여물어 가는 참깨 밭에서 자세히 얘기해 보니 바로 그 유물이 나왔다는 곳이 우리가 찾다 지쳐 포기한 고구려 집터인 것이다. "1955년 경 우리 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우리 밭에서 유물을 파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몰랐는데 고고학자들이 고구려인의 집터(高麗人的防身)나 고구려인의 무덤(高麗人的墓)이라고 했다. 현재는 강냉이밭이다." 옛 생각을 정확하게 기억해 낸 안봉각(安鳳閣) 씨는 1943년생(54세)인데, 한 살 때 신합둔에서 지금 살고 있는 양과수로 이사와서 54년간을 한결같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곳을 안내해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당나귀가 끌고 온 마차도 있고 일을 해야 한다며 난색을 표했으나 현 선생의 능숙한 설득과 마침 같이 일하는 사람이 한 사람 와 주었기 때문에 당다귀를 맏끼고 출발하였다. 안봉각 씨를 싣고 다시 큰길로 나와 한 블록 가서 오른쪽으로 가니 그 길이 바로 우리가 아까 양과수에서 나올 때 지나쳤던 길이 아닌가? 모르면 지나쳐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은길로 들어서니 오른쪽에 4줄로 포플러가 잘 자라고 있고, 그 옆 옥수수밭이 바로 고려방신이라 했다. 그리고 거기서 50미터 가면 동네 어귀 첫집이 바로 안씨의 집이었다. 옥수수가 사람 키를 넘으니 현장확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어찌되었든 고구려 집터를 찾는 행운을 얻었고, 고려집터라는 용어는 현지인들의 말이 아니라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출토된 유물을 가지고 고구려 집터라고 판단했다는 대단히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안씨는 현지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정말 순진한 농부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100% 믿을만 하다. 심지어는 우리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이다. 우리가 계속 한국말로 얘기하자, "당신들은 왜 한어(중국어) 안하고 몽고말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몽고말인지 조선말인지도 구분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생산대 소대장(우리나라 반장 비슷한 것)까지 했기 때문에 애국심도 있고 제법 똑똑한 사람이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처음 약속한 10원 외에 담배를 두 갑 주자 한사코 사양할만큼 순진한다. 운전수에게 안씨를 아까 일하던그 곳으로 다시 데려다 주라고 했더니 두 말 않고 출발한다. 지금 중국에 돈 한 푼이라도 더 받을려고 잔재주를 부리는 운전수가 많은데 오늘은 참 인복이 많은 날이다. 운전수가 안씨를 데려다 주러 간 사이에 우리는 편안히 앉아서 고구려 집터를 보며 만족한 대화를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서 교수가 기와조각과 도자기 조각을 찾아낸다. 부삽을 안 가져온 것이 후회된다. 어찌됐든 오늘의 수확은 크다. 시간은 이미 5시 30분이됐다. 상쾌한 마음으로 돌아오며 바라보는 흥안령산맥은 바로 고구려인들이 북적(北狄)과 대치한 대 산성 자체였구나 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우란호터시에 돌아오니 6시 30분, 우선 호텔에 돌아와 내일 일정에 대해 현 선생과 함께 작전회의를 하였다. 내일 하루에 봐야 알 산성이 4곳이나 되기 때문에 만만치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내일 하루는 우란호터시 서남쪽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고 하루를 이곳에서 더 잔 뒤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8시가 다 되어 조선족 식당인 연변찬청에서 늦은 저녁. 호텔에서 걸어서 얼마 가지 않아 있는 이 음식점은 학교 교원생활를 하다 자식들 교육을 위해 식당을 한다고 한다. 현 선생도 잘 아는 사이이고 가정사정도 훤하다. 식당하여 딸 셋, 아들 하나를 모두 대학에 보내는 억척 어머니인 것이다. 9시가 훨씬 넘어 돌아오니 호텔 종업원이 따뜻한 물을 받아 놓았다. 이곳에는 7시에서 9시까지 2시간만 따뜻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늦으면 목욕을 할 수가 없다. 호텔에 국제전화까지 가능한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어 전화카드를 사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북경의 교장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사모님과 따님이 우리 호텔에 인사차 찾아왔는데 없었다고 한다. 심양의 리 리양에게 돌아가는 비행기 자리 확인을 부탁하였다. 8월 18일(월) 빠라커따이(巴拉克 ) 부근의 고구려 성들 오늘의 답사는 순전히 65년 전 러시아 고고학자 렐리졔프의 조사결과를 가지고 찾아나서기 때문에 정말 뜬구름 잡기이다. 그래서 엊져녁에서 공부를 했지만 부족해 아침에도 5시에 일어나 일찍부터 공부를 계속했다. 우선 오늘 찾아갈 성들을 지명을 위주로 다섯 곳으로 요약을 하여 수첩에 적으며 번호를 붙였다. 1. 빠라커따이(巴拉克台) 동쪽 2㎞ - 허리에하다성(赫列哈達城) 2. 빠라커따이(巴拉克台) 동쪽 5㎞ - 쿠리쿠타이(庫里庫台)山 3. 빠라커따이(巴拉克台) 북쪽 8㎞ - 귀류하(歸流河) 우안, 현지인 소성자(小城子)라고 부른다. 4. 빠라커따이(巴拉克台) 서남쪽 15㎞ - 태아과촌(台牙戈村) 전 비노촌(毖老村) 고성터 5. 호우터카사( 特 沙) 고성 - 빠오얼툰(鮑爾屯)-치아얼찌아춘(恰爾加村)의 서쪽 1.5Km 지점 빠오리후영즈(鮑里胡營子)의 산골짜기 렐리졔프의 보고서를 읽고 또 읽으며 지도를 펴놓고 보고서에 나온 지명을 찾지만 비교적 자세한 지도에도 전혀 같은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제 현 선생과 작전회의 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딱 한 곳, [빠라커따이쥐즈(巴拉克台局子)]와 비슷한 [빠라커따이(巴拉克 )]라는 지명이 유일한 희망이다. 왜냐하면 1번부터 4번 까지는 모두 [빠라커따이]가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자료집에는 빠라커따이를 安平河街屯이라고 했고, 실제 지도에는 흥안진(興安鎭)이라고 한 것도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빠라커따이라고 하면 모두 알고 있었다. 문제는 5번에 나온 지명은 한 곳도 찾아내지 못하고 막연히 떠난다는 것이다(나중에 기행문을 쓰면서 자세히 보니 '호리후영자는 빠라커따이 서쪽 10㎞ 지점에 있다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호텔 아침식사 시작이 7시, 식사를 마치고 7시 40분 출발. 오늘도 어제 수훈을 올린 운전사를 그대로 동무삼았다. 흥안호텔은 시내 북쪽에 있기 때문에 가장 번화가인 흥안대로를 타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와 신교대가(新橋大街)와 만나는 로타리에서 서쪽으로 꺾어서 시내를 빠져 나간다. "자, 오늘은 장수왕의 점령비를 찾자" 서 교수가 새로운 희망사항을 선언한다. 광개토호태왕이 비려를 점령했던 루트가 임동지방이라면, 이곳은 그 뒤 장수왕이 유연(柔然)과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할 때 넘어간 루트일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어딘가 장수왕이 세웠던 점령비가 있을 수 있다는 장미빛 꿈이었다. 30년대에는 빠라커따이까지 60㎞라고 했는데 현제는 41㎞로 나와 있다. 그만큼 길이 곧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1차 목표는 소성자(小城子)라는 곳이다. 오늘의 목적지 3번을 현지인들이 소성자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침 지도에 소성자라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에는 빠라커따이에서 북쪽으로 8㎞라고 했는데 소성자는 동쪽이다. 그러나 2번의 위치가 비슷하고, 보통 성자(城子)라는 지명이 있는 곳은 대부분 고성이 있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에 일단 가보기로 했다. 소성자(小城子)는 고구려 성 시내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대파구(大巴溝)를 지나며 비포장도로로 들어선다. 출발하여 1시간 쯤 가자 덕승둔(德勝屯)이 나오고 10여 분 더 가자 중신촌(中信村)이란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간다. 조금 가다 반대편에 오는 딸딸이를 세워 길을 물었더니 빵택시를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안된다]는 것이다. 이 길이 소성자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강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지름길을 가지 못해 거의 1시간 이상 더 걸리는 길을 돌아갔다 와야 했다. 사실 하루가 지난 뒤 생각해 보면 짚차를 빌리지 않고 빵택시를 빌린 것은 실수였다. 되돌아와 큰 길을 조금 가니(09:05) 공화촌(共和村)을 지나고, 고개를 넘어가니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소성자로 가는 길이 좋지 않은데다 길을 고치는 곳이 있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출발하여 두 시간만에 드디어 첫 번 목적지인 소성자에 도착하였다. 길가에 나와있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고 물었으나 성터를 아는 사람이 없다. 한 아주머니가 동네를 지나 조금 나가면 소학교가 있는데 교장선생님에게 물어보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걸어서 소학교쪽으로 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계속 물었다. 이 신성한 임무는 물론 모두 현 선생이 맡는다. 공든탑이 무너지랴. 80살이 넘은 노인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할아버지를 만나 성이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있다는 것이다. "고리청(高麗城)이라고 불렀지. 돌절구가 나왔다. 크고 작은 것이 많이 나왔다." 여기가 어디인가? 내몽고까지 와서 가는곳마다 고구려 성 예기를 듣다니, 정말 꿈만 같은 일이다. 85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할아버지는 왕년에 생산대대장까지 지낸 동네일꾼이기도 하다. 정말 아슬아슬한 생각이 든다. 이런 노인이 돌아가시고 나면 누가 이 사실을 증언해 줄 것인가. 중요한 제보자이기 때문에 여기 그이 인적사항을 적는다. 이름: 이재(李財) 나이: 금년 85세 주소: 興安盟 科爾泌右翼前旗 巴拉格 鄕 小城子屯 현장안내를 부탁했더니 기꺼이 나서준다. 소성자둔에서 북쪽으로 중안촌(中安村)으로 가는 길을 따라 동네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에 들판이 나오고 200여 미터 언덕을 내려가자 옥수수 밭이 나온다. 바로 그 첫밭이 고려성이라는 것이다. "몇 십년 전에는 해바라기 밭에 성벽이 있었다. 1향( =坰)이 넘는다." 이 노인은 평소 알고 있는 성의 규모를 경작하는 농지의 단위를 일러준다. 소성자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큰 성은 아니다. 정확한 지번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해서 누가 경작하는 밭이냐고 했더니 다섯 집이 공동경작한다고 해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렐리졔프가 언급한 성 가운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우선 내용을 보기로 한다. 현지 주민들의 소개에 따르면, 빠라커타이쥐즈(巴拉克台局子)의 동쪽 5Km 지점에 쿠리쿠타이(庫里庫台)山이 있다고 한다. 그 산의 동남 비탈 작은 구릉과 성벽사이에서도 도자기 조각들과 돌 사라탑이 하나 발견되었으며 철화살촉과 철창끝도 발견되었다. 이들 성지에 대한 조사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멀리 빠라커타이쥐즈(巴拉克台局子)의 북쪽 8Km 지점의 꿰이아이리에얼허(歸埃列爾河)의 右岸에도 규모가 상당히 큰 古城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정확한 城名은 알 수 없다. 기록에 근거하여 판단하여 볼 때, 그 것들은 "高麗城"類 의 古城址일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小城子"라고 부른다.(K. A. 熱列玆雅科夫 씀, 왕덕후 옮김 [興安省的考古學資料], {黑龍江考古民族資料譯文集} 제1집, 1991, 83쪽) 방향으로 보아서는 쿠리쿠타이 산 밑의 성같은데 주위의 산이름을 확인하지 못해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앞으로 더 확인이 필요하다. 단번에 찾은 허리에하다(赫列哈達) 고구려 성 10시 30분, 소성자를 떠나 30분 쯤 되돌아 나와 큰길로 들어선다. 빠라커따이로 가자.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일단 한 건을 올린 답사단의 마음은 가볍다. 두 번째 목표는 빠라커따이 동쪽 2㎞ 지점에 있는 허리에하다(赫列哈達)성이다. 지금 우리가 서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빠라커따이에 도착하기 전에 성이 있기 때문에 자주 묻기 시작하였다. 11시 15분 마을을 지나며 길가 돌담 너머 부부에게 성을 물었다. "바로 뒷산에 산성이 있는데 돌절구가 있다." 이건 또 왠 떡이냐, 단 한 번 물어보니 바로 산성이라고 하고, 거기다 고구려 성이라는 증거가 되는 돌절구까지 있다니. 우선 기록을 하고 보자. 이름: 齊振祥 나이: 47세 주소: 巴拉格 鄕 齊家店村 렐리제프의 보고서에는 제가점촌이 제장촌(齊張村)이라고 되어 있는데 張씨들이 모두 이사를 가버려 현제는 齊씨들만 살기 때문에 제가점촌이 되었다고 한다. 제씨는 두말 않고 앞을 선다. 빵택시가 올라갈만큼 산등성이까지 길이 잘 나 있다. 등성이에 올라가니 돌집이 한 채 있고 그 뒤에 바로 흙으로 쌓은 산성이 나온다. 산성에 올라보니 이것은 틀림없는 1번 산성이다. 우선 렐리졔프의 기록을 보자. 빠라커타이(巴拉克台) 地區에서는 두번째의 古城遺址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곳을 일컬어 빠라커타이쥐즈(巴拉克台局子)라고 한다. 이 곳은 王爺廟의 서쪽 60㎞에 있는데 꿰이아이리에얼허(歸埃列爾河, 歸流河)로 흘러들어가는 빠라커타이허(巴拉克台河, 漢語名:安平河)의 左岸에 위치한다. 이 고성유지는 본인이 동년(1933년) 10월 26일 빠라커타이쥐즈(巴拉克台局子)의 동쪽 2Km 지점에서 발견한 것이다. 성지는 高地의 완만한 비탈 위에 있다. 그 곳의 서북과 서남 양면은 대부분 경사가 급한 절벽이다. 절벽의 높이는 약 50m로서, 적을 방어하는 천연요새를 방불케 한다. 고지의 동북과 동남면은 대부분 완전히 지면처럼 평평하다. 성지가 소재하고 있는 곳의 지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방어용 성벽은 매우 불규칙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그림3). 성벽의 총 길이는 약 210m이다. 성벽의 두께 정도를 보았을 때 성벽은 5개의 馬面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벽에는 문이 두 개 있는데, 큰 문은 남면에 있고, 작은 문은 동면에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m이고, 성벽 기초부분의 폭은 2.5∼3m에 달한다. 지층의 표면은 점토이다. 고지의 완만한 비탈은 평지를 향하여 뻗어있어 바람의 장기적인 자연작용를 받아 지표의 풍화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어떤 곳은 아래의 石層이 현저하게 드러나 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내가 성지의 표면에서 대량의 도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을 순조롭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의의있는 수확은 두 개의 石器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단단한 흑색 돌로 제작된 창끝으로 판단되는데 이 것은 정교한 가공을 거쳐 뾰족하게 갈아 만들었다. 그 것의 크기는, 길이 6Cm, 폭3.7Cm, 두께1.7Cm 이다. 다른 하나는 회색의 작은 돌인데 모양으로만 보아서는 어떤 물건의 조각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것의 돌출된 부분의 표면은 갈아서 생긴 조밀한 平行條紋으로 덮혀 있다. 크기는 7.4+5.6+1.5Cm이다. 채집된 도편의 특징을 관찰해 보았을 때, 용기는 테쌓기로 만들었고, 陶器는 바달이 평평한 것이며, 도질은 회색이다. 紅色 陶片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외에 백색 점토를 구워서 만든 도자기의 조각이 발견되었다. 안팎 양면에는 모두 짙은 녹색의 유약이 발라져 있다. 5가지의 서로 다른 무늬를 가진 도자기 조각을 수집하였다. 무늬는 기하무늬의 일종이다. 고성지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이곳을 일컬어 허리에하다(赫列哈達)라고 한다. 400∼500전의 明朝 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려인이다. 본인이 수집하였던 도기는 아마 그들이 남긴 기물일 것이다.(위와 같음) 밖으로 나와 주인을 기다리는 돌절구 렐리졔프의 조사가 아주 자세한데다가 당시과 거의 변동이 없을 정도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돌절구를 보여주려는 제 씨의 노력이 우리의 보고싶은 마음보다 앞선다. 성의 구조을 파악하고 있는데 돌절구 보러 빨리 오라고 성화다. 30년대의 기록에는 없는 돌절구가 완전히 몸을 들어내놀고 있다. 밭을 갈아먹는 동안 제씨가 발견하고 파냈으나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재보니 높이 40㎝, 너비 68㎝, 확의 깊이 23㎝, 확의 너비 27㎝이다. 평면도에는 남문이 서남 모서리쪽에 있는데, 현제는 동남 모서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그 동안 변형이 된 것인지 당시 잘못 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차이가 있다. 동벽을 따라가 북벽을 보니 정말 난공불락의 절벽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고구려 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많이 쌓지 않고도 방어하기 좋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벽을 이용한 경우가 허다하다. 오녀산성이 그렇고, 백암성이 그렇고, 비사성이나 석성이 모두 그런 경우이다. 북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시원한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서쪽에 빠라커따이진이 보이고, 빠라커따이강이 조용히 흐른다. 30년대 평면도를 보면 바로 절벽 밑으로 강이 흘렀는데 그 동안 물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빠라커따이에서 북산둔(北山屯)을 거쳐 강가둔(江家屯)으로 가는 도로 쪽으로 흐르고 있다. "저 산은 마중산(馬中山), 저 산은 마안산(馬鞍山)" 제씨는 물어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척척이다. 서벽을 돌아 다시 밭으로 들어서 도기 조각을 주었다. 도기조각은 물레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30년대 나온 테쌓기한 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성안에 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내려오는 길에 동남쪽 산 아랫쪽에 샘이 있다고 가르켜 준다. 내려와 성을 무어라고 부르느냐고 묻자 제씨는 "고성이다"고 하는데 부인이 "고려성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해 주어 30년대의 " |
출처 : 문경을 사랑하는 강명윤^^~
글쓴이 : 강명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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