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고려 동녕로는 북경과 가까왔다.

Dr.박 2014. 10. 30. 13:06

 

실제 고려의 영토를 원과 명이 다른 이름으로 쪼개서 붙인 이름들.

 

 

元史    59 志第11 地理2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壤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垣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余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 혹은 장안성이라고 한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낙랑 현토군의 낙랑 땅이다. 장수왕 고련이 평양성에 기거 하였으며 당이 고구려를 없애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 동남쪽 천 여리에 있지만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이라 했다. 지원6(1269) 이연령, 최탄, 현원열 등 부주 군현 등 60성을 들어 원에 바치다. 지원8(1271)서경을 동령부로 고치고 13(1276) 동령로 총관부로 이어서 녹사사를 설치하고 정주, 의주, 인주, 위원진을 나누어 파사부에 예속시키다.  

 

明史 卷41 地理2 

廣甯衛元廣甯府路江武初廢二十三年五月置衛洪武二十五年三月建遼王府建文中改封湖廣荊州府西有醫無閭山南濱海東有路河東北有珠子河下流皆注於遼河又板橋河在西南流入海北有白土廠關又有分水嶺關西北有魏家嶺關又北有懿州屬遼陽路洪武二十六年正月置廣甯後屯衛於此永樂八年州廢徙衛於義州衛城又西南有閭陽關東北有望平縣元俱屬廣甯路又西北有川州元屬大寧路又東北有順州西北有成州元俱屬東甯路又西南有鐘秀城元置千戶所於此俱洪武中廢東距都司四百二十裏 

광녕은 원나라 광녕부로이다. 홍무23(1390) 5월 위를 설치하고 25(1392) 3월에 요왕부를 건설하다. 건문제때 호광형주부로 봉하다.서쪽에 의무려산이 있다. 남쪽에 바다가 가깝고 동쪽에 로하, 동북에 주자하가 있다. 아래로 흘러 요하에 이른다판교하가 서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분수령관이 있다. 서쪽에 위가령관이 있다. 북쪽에 의주가 있는데 원나라 때 요양로에 속했다. 홍무261월 광녕후둔위를 설치했다영락8(1410)에 의주위성에 옮겼다. 서남에는 여양관이 있다. 동북에는 망평현이 있다. 원나라 때 모두 광녕로에 속했다. 서북에는 천주가 있고 원나라 때 대녕로에 속했다. 동북에는 순주가 있는데 서북에는 성주가 있다.서남에는 종수성이 있다.모두 원나라 때 동녕로에 속했다

 

동녕로는 원나라가 고려를 위압할 때 최탄 홍복원등 3인이 서경을 위시한 60여개 성을 원에게 들어다 바친 후 고려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고 원나라에 항복했을 때 고려의 서경에 설치한 기관이다. 이후 충렬왕시기에 원세조 쿠빌라이의 위세를 등에 업고 충렬왕 포함 안하무인 위세를 떨치며 의 요구대로 삼별초를 진압했던 김방경을 무고했던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진실이 드러나자 그 틈을 이용해 기세를 꺾고 원에게 영토반환을 요구하여 결국 상당한 땅을 돌려받았다.

 

우리가 만주로 알고 있는 동녕로는 만주에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요녕과 북경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다. 서경을 포함한 동녕로는 북경과 가까이 접했던 땅으로 요녕성 요하 동편 부터 북경 順義 지역 까지의 넓은 지역을 말하는데 60여개 성이라면 상당히 넓은 지역을 의미한다

 

실제 아래 요양로, 심양로, 개원로, 함평부, 실제로는 전부 고려의 영토 였으나 원나라와 40여년에 걸친 대몽항쟁 후 즉 원종 이후 복속 당하자 그 지역을 원나라 땅이라 이름하여 부른 것이며 실질적 지배는 고려가 했음에도 금사, 원사, 명사에는 중국왕조의 지배지역으로 개작해 쓴 것이다.실제 개원로의 경우는 고려, , , , 청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기록한 것을 후대에서는 진실로 믿고 원, 명의 영토로 규정 지어버린 것이다.  

 

元史  59 志第11 地理2 

遼陽路

唐以前為高句驪及渤海大氏所有梁貞明中阿保機以遼陽故城為東平郡後唐升為南京石晉改為東京金置遼陽府領遼陽鶴野二縣後復改為東京宜豐貴德州廣寧府來遠軍並屬焉元初廢貴德復州來遠軍以廣寧府婆娑府懿州蓋州作四路直隸省至元六年置東京總管府降廣寧為散府隸之十五年割廣寧仍自行路事直隸省十七年又以婆娑府懿州蓋州來屬二十四年始立行省二十五年改東京為遼陽路後廢婆娑府為巡檢司戶三千七百八口三萬三千二百三十一壬子年抄籍數

고구려와 발해 대씨왕조 지역이었다요태조 아보기가 요양고성을 동평군으로 하였다. 후당이 남경으로 하고 석진이 동경으로 고쳤다. 금이 요양부를 설치하였으며 후에 다시 동경으로 하였다. 원 때 귀덕, , 복주, 래원군을 폐하고 광녕부, 파사부, 의주, 개주를 직예성으로 하다. 지원6(1269) 동경 총관부를 설치하고 광녕부를 내려 각부로 예속시키다. 24년 행성을 세우고, 25년 동경을 고쳐 요양로로 하였다.(실제 지명 이동이 있었는데 하북 북부에서 요녕으로 이치된 것으로 보인다)

 

瀋陽路

本挹婁故地渤海大氏建定理府都督沈定二州此為沈州地契丹為興遼軍金為昭德軍又更顯德軍後皆毀於兵火元初平遼東高麗國麟州神騎都領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四十餘城來降各立鎮守司設官以撫其民後高麗復叛洪福源引眾來歸授高麗軍民萬戶徙降民散居遼陽沈州初創城郭置司存僑治遼陽故城中統二年改為安撫高麗軍民總管府及高麗舉國內附四年又以質子淳為安撫高麗軍民總管分領二千餘戶理沈州元貞二年並兩司為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仍治遼陽故城轄總管五千戶二十四百戶二十五至順錢糧戶數五千一百八十三

본래 읍루의 옛땅이다. 발해 대씨가 정리부로 하였으며 심주, 정주 2주에 도독을 두다. 이곳을 심주라 한다.거란이 흥요군이라 하고 금은 소덕군 다시 현덕군으로 하였다. 원초 요동을 평정할 때 고려국인주신기도령 홍복원이 서경, 귀주 등 40여개 성을 이끌고 항복하다. 각각 진수사를 설치하고 40개성 고려민을 위무하였다. 고려가 다시 반란(삼별초 난을 이름)을 일으키자 홍복원이 사람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고려군민 만호를 받아 요양 심주에 나누어 살게 하다. 중통2(1261) 요양을 고쳐 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하였다. 고려가 전체적으로 내부하였다. 중통4(1263) 인질 순을 안무고려군민총관에 임명하다.

 

開元路

古肅慎之地唐曰黑水靺鞨唐初渠長阿固郎始來朝後乃臣服以其地為燕州置黑水府其後渤海盛靺鞨皆役屬之又其後渤海浸弱為契丹所攻黑水復擅其地東瀕海南界高麗西北與契丹接壤即金鼻祖之部落也初號女真後避遼興宗諱改曰女直太祖烏古打既滅遼即上京設都海陵遷都於燕改為會寧府金末其將蒲鮮萬奴據遼東元初癸巳歲出師伐之生禽萬奴師至開元率賓東土悉平開元之名始見於此乙未歲立開元南京二萬戶府治黃龍府至元四年更遼東路總管府二十三年改為開元路領鹹平府後割鹹平為散府俱隸遼東道宣慰司至順錢糧戶數四千三百六十七

옛 숙신땅이다. 수당 때 흑수말갈이다당나라 초에 신복해와 연주(현 북경지역)을 그 땅으로 하고 흑수부를 설치하다. 발해가 성하자 말갈이 모두 그에 속했다.후에 발해가 약해져 거란이 공격하자 흑수가 그 땅을 물려받다.동으로 바다에 접하고 남으로 고려 서북으로 거란과 국경을 접했다. 즉 금시조 아골타의 부락이다.처음엔 여진이라 하고 후에 요흥종실의 휘를 피하여 여직이라 하다.태조 아골타가 요를 멸하고 상경을 설치하자 연(북경 방산현)지방에 릉 등을 옮기니 회령부라 고쳤다.금나라 말에 그 장수 포선반노가 요동에 거하였다.원초 계사년에 장수로 하여금 정벌하고 솔빈부로 하였다.개원이란 이름은 거기에서 연유한다. 을미년에 개원을 세우고 남경 2만호부가 황룡부를 다스렸다. 지원4년 동녕로총관부로 고쳤다. 23년 개원로로 고치고 함평부로 하였다. 나중에 요동도선위사에 속하게 하였다.

 

鹹平府

古朝鮮地箕子所封漢屬樂浪郡後高麗侵有其地唐滅高麗置安東都護以統之繼為渤海大氏所據遼平渤海以其地多險隘建城以居流民號鹹州安東軍領縣曰鹹平金升鹹平府領平郭安東新興慶雲清安歸仁六縣兵亂皆廢元初因之隸開元路後復割出隸遼東宣慰司

고조선떵이며 기자 봉지이다.한나라때 낙랑에 속하고 후에 고구려가 그땅을 침략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멸하자 안동도호부를 세우고 통치하였다.이어 발해 대씨가 그 땅을 이어 받았다. 요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땅이 험하자 성을 세워 유민을 살게 하였다. 함주 안동군으로 이름하고 함평현으로 하였다. 금나라가 함평부를 이어받고 평곽, 안동, 신흥, 경운, 청안, 귀인등 6현을 통치하였다.병란이 일어나자 모두 폐하였다.원초 이로 인하여 개원로에 속하게하고 후에 나누어서 요동선위사에 속하게 하였다.

 

심제 역,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