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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골수복을 위한 방법

Dr.박 2015. 1. 4. 22:57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11년(723)에는 달말루와 달구 두 부족의 수령이 조공해 왔는데, 달말루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는 본시 북부여(北扶餘)의 후예이다. 고려(高麗)가 북부여를 멸망시킨 뒤에 북부여의 유민들이 나하(那河)를 건너와서 살았다.' 했다."

하였고, 어떤 이는,

"나하는 곧 타루하(他漏河)인데, 동북쪽으로 흘러서 흑수(黑水)로 들어가고 달구는 실위(室韋)의 족속으로 나하의 동결(凍結)된 북쪽, 말하(末河)의 동쪽에 위치하였는데, 서쪽으로 동쪽 실위와 접하고 동북쪽으로는 달말루로 통한다."
청장관전서 제60권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고대기록을 토대로 지도를 작성하면 위와 같다. 구륜박즉 호륜호의 위쪽으로 난강이 나하이고 흑룡강에 합류하고 동남으로 흐르는 강이 홀한하로 발해의 수도로 흐른다. 구륜박의 서남은 속말말갈 오소고락부의 땅이고 구륜박의 동남쪽은 속말말갈 본거지이다. 구륜박의 좌우로 흑수말갈이 거주하고 그 위와 서쪽으로 실위가 거주했다. 실위가 바로 다른말로 달구라고 했고 달구는 자신들을 고구려에 망한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다. 즉 몽골의 신화와 고구려의 신화가 닮은것이 이제 설명되는 것이다. 또한 부여를 가리켜 진한의 부족이 된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진한은 신라이며 소호금천을 조상으로 모셨다. 즉 몽골은 흉노를 조상으로 여겼다는 것도 설명이 된다. 흉노의 후예가 신라인것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결국 현재의 몽골인은 북부여의 후손이며 고구려의 형제였다. 달말루부족은 더위쪽으로 가서 지금의 부리야트 공화국주민이 된것으로 보인다

 

 

口北三:隸口北道。直宣化府,張、獨二口北。明季,韃靼諸部駐牧地。康熙十四年,徙義州察哈爾部宣、大邊外,壩內農田,壩外牧廠,順治初置,在張、獨者六,其一奉天彰武台。及察哈爾東翼四旗、西翼半旗。雍正中,先後置三理事同知。光緒七年,並改撫民同知。廣六百里,袤六百五十裏。

청사

구북삼위는 구북도에 예속되는데 선화부에 속한다. 명나라때 달단모든 부족의 목축지였다. 중략 넓이6백리 남북650리이다.

 

 

 

韃靼地,東至兀良哈,西至瓦剌。

명사

달단의 땅은 동쪽으로 올량합에 닿고 서쪽으로 와라에 닿는다.

 

 대명일통지의 명나라고지도상의 선부와 올량합

 

 고려말 태조이성계는 고려조정에 보고하길 우리의 경계는 달단,심양,여진이다라고 했다. 청나라기록에서 달단의 목축지를 발견했는데 바로 선부와 북악사이였다. 그 땅이 생각보다 작았다. 동서6백리 남북 650리 밖에 안되며 명나라기록에서 달단의 동쪽은 올량합이라 했는데 고려말부터 올량합은 태조이성계에게 충성맹세를 하러 왔다는 기록이 있다. 즉 태조가 나라를 세울때는 달단의 목축지는 태조의 영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태조는 퉁두란 이지란을 보내 북방의 모든 부족에게 충성맹세를 받게하고 관직을 주었는데 이때 달단의 목축지도 태조의 휘하에 들어온것 같다.

 

 

대명일통지 북적위치

 

세종실록에는 북적을 대비하라고 평안도 함경도에 명령을 내렸는데 세조실록에는 북적이 귀순했다고 써있다. 즉 달단의 목축지는 태조이래로 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감숙의 북적이 세종때는 조선과 경계를 짓고 세조때는 항복을 하겠는가!!! 청나라기록에서는 칭기즈칸이 몽골과 신강을 통일할때 가장 서쪽에 있던 나이만부족이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고 이 나이만부족 전부가 조선의 길림해에서 조선군과 대규모로 교전했다고 써있다. 나이만에 대해 명사와 청사는  서흉노였다고 써있다. 흉노전체가 고구려에 종속되었다는 문헌비고의 기록을 참조하건데 고구려가 나이만의 상국이었던 적이 있었으며 고구려가 한때 신강일대까지 장악했다는 증거가 된다. 게다가 조선역시 나이만과 멀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달단은 그 영역이 고려말에는 북경서북쪽에도 있었으나 이들 자체가 유목민족인 까닭에 영토가 계절에 따라 줄었다 늘었다 했던것 같다. 그들이 목축지를 따라 이동을 하다가 조선개국후에 상당수가 조선에 귀순하고 일부는 몽골서부로 이동해 나중에 와라가 된다. 조선의 영역은 바로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수복해야할 고토이다.

 

나이만과 조선군이 길림해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을 처음보고 내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왜 지금까지 이름난 학자들이 그런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일부러 안찾은 것인가 아니며 찾고도 무시한 것인가

칭기즈칸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이만 부족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는데 그부족은 칭기즈칸이 몽골통일시 가장 서쪽에 있었고 가장강력했다. 왜  나이만이  모든 부족병사를 동원해서 조선과 전쟁을 벌였겠는가!!!

올량합조차도 분명히 조선과 청의 기록에 심지어 왜놈들의 기록에도 조선의 속국이었고 왜란때는 올량합이 수만의 병력을 파병해 조선을 돕고 누르하치가 올량합을 침공할때는 조선에서 수만의 병력을 파견해 올량합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써있다. 조선의 변방속국 올량합이 무너지자 곧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나이만이 조선의 변경을 침공할수 있었던 것이다.

고명하신 국개학자들은 조선을 그저 한반도에 갇힌 나라로 보고 그러면서도 간도수복여론이 강하니 간도는 조선땅이었다라고 발표를 한다. 모순이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태조이성계의 요동수복에 대해서 짤막하게 썼다. 그저 원나라말기 잠깐 수복했다가 다시 뺏겼다고 그러나 조선의 기록을 검토해보라 그땅이 과연 명에 뺏겼는지 

어째서 최윤덕장군이 사막을 건너 한해를 건너 진격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지 설명해 보라 왜 조선전기의 시인들은 함경도를 가리켜 흉노의 땅이라고 했는지 왜 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했다고 기록했는지 설명해 보라

 

결국 몽골땅은 원래 부여의 후손이 세운 부여의 땅이었고 이후 고구려의 땅이었으며 나중에는 조선의 땅이 된다. 청나라가 조선땅을 뺏기전까지 임진왜란직후에도 조선의 땅이 맞았던 것이다.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몽골인과 한반도인은 부여의 후손으로 동족임을 널리 알리고 홍보해야 할것이다. 게다가 근세까지 몽골은 조선의 통치를 받았음을 알린다면 몽골인은 우리를 달리 보게 될것이다. 즉 그들의 동포로 받아들일 것이다.

 

둘째로 서로간의 교류를 늘려야 한다.

몽골국민 모두가 남한에 온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다. 겨우 250만 인구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거리가 멀어서 대규모 이민자도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몽골국민에 대해 대한민국국민으로 받아들이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준다면 양국간의 교류는 더 활성화 될것이다. 이미 우리는 고령화사회에 들어섰기에 20년뒤면  젊은사람 2명이 노인 1사람을 부양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결국 동족들을 불러들임으로써 노령화사회를 대비한다면 이민족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셋째로 과감히 통일을 추진하라

몽골의 지하자원은 세계가 탐을 낸다. 몽골국민들은 우리에게 제일 호감을 가지고 있다. 무얼 주저하는가 일단 경제협력체부터 구성하고 EU처럼 경제공동체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국가통합을 이룩하라 그러면 우리는 세계에서 손에 꼽는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될것이고 지하자원역시 막대하게 얻을 것이다. 국민투표에서 몽골은 우리의 손을 들어줄것이다 오히려 우리 국민들이 통일에 반대할 수있다. 왜냐면 초기 사회간접시설투자에 몽골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우리가 몽골의 지하자원을 얻고 개발함으로써 발생되는 이익을 생각한다면 몇배의 이익이 남는 셈이다.

 

주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마라 북한과의 통일보다 몽골과의 통일이 더 우리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줄것이고 남북통일을 위한 예행연습이 될것이다.

 

출처 : 소오강호
글쓴이 : 조선의 후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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