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러시아 기행 4] 하바롭스크, 바람과 종족의 이동
하바롭스크, 바람과 종족의 이동
하바롭스크역에 하차했다. 현지 시각 오전 8시. 횡단열차는 시간 엄수를 잘 했다. 전후좌우로 두리번거렸더니 플래폼쪽에서 동양인 한 사람이 나왔다. 혹시 O 선생님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춥고 낯선 이역에서 나를 마중나온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O 선생님은 사할린 출신의 한인 2세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어 고려인으로 불리는 분이었다. 72세라고 하지만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신심이 강건하고 씩씩해 보였다. 우리는 도보로 먼저 중앙시장에 갔다. 가히 생활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현지의 의식주 관련 상품이 모조리 진열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이 불법으로 입국하여 시장을 개척했다는 이곳은 빵, 육고기, 생선, 유제품, 보드카, 꿀, 차가버섯, 한국 김치, 의류와 골동품 등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시장 2층에 올라가 간이식당에서 믹스커피를 한 잔했다. O 선생님은 음식과 언어가 다르면 같은 민족일 수 없다고 못박으면서 이민족끼리 결혼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고 했다. 작년에 한국의 한 사내가 하바롭스크에 여행 와서 러시아 여자에 반해 고비용을 지출하고 결혼에 성공했지만 그 기간이 2,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사내가 미친 작자라고 O 선생님은 비난했다. 고려인 3세인 자기 자식들도 모두 고려인끼리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둘째 아들(70년생)이 엇나가 러시아 여자와 살고 있다며 양주는 아직도 그들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에선 소비에트 이후 여성들의 활약이 대단해 남자들이 다방면에서 역차별을 당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남자들이 집에서 내쫓기는 일도 흔하고, 이혼 후 전처에게 매달 보내는 양육비 부담으로 생활고를 겪는 남성들도 많다고 했다. 모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다 보니 부모들은 결혼한 아들 명의로 부동산을 등기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레닌광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대형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했다. O 선생은 일본어 교재며 중국어 교재는 많이 출판되는데 한국어 교재는 전무한 편이라며 아쉬워했고, 고려인 3․4세 대상의 한국어 교육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교육계의 유명인사인 모스크바1086고려인공립학교 엄넬리 교장을 혹시 아느냐고 물었더니, 평안도․우수리스크․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이라며 단번에 알아 보았다. 러시아 행정지도와 지형지도 두 장을 구입한 후 서점을 나왔다. 레닌광장쪽으로 옮겨 주청사 건물, 레닌동상, 의과대학 건물 등을 구경했다. 이어 인투리스트호텔 지하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강변 전망대로 옮겨 꽝꽝 언 아무르강과 부옇게 흐린 창공의 태양을 구경했다. 공원부지 안에 위치한 향토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인상적인 것은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주변에 산다는 아무르호랑이 박제와 아무르강이 오츠크해에 합류하는 지점에 서식하는 물개와 연어를 묘사한 그림이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하바롭스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하구 니꼴라옙스키(이용악의 시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참고)까지 아무르강 크루즈 여행을 하고 싶다. 그것도 유빙이 둥둥 떠다니는 해동기 늦봄쯤에 했으면 좋겠다. 원주민들이 새봄을 맞는 축제라도 벌인다면 동참하면서 말이다. 그 길고 긴 강줄기를 따라 최근 독일 여행객들이 생태 탐방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향토박물관에서 안내인으로 일하는 동양계 한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몽골족의 한 계통인 부레야트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이칼호 동편 울란우데 북쪽에 자신의 친척집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종족의 문화와 생태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원하다면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다. 딸이 벨기에 남자와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손자 아이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며 본인 자신도 신기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바이칼 주변에는 빗살무늬토끼, 샤머니즘, 곰․호랑이 토템, 고시레 풍속 등 한민족의 문화와 유사한 것들이 비일비재하다고 O 선생은 일러 주었다. 종족의 이동이나 문화의 이동이 시베리아 기단이 한반도에 이동하는 것처럼 뭐 특별할 게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겼는데, 현지에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니 느낌이 특별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우스뻰스키성당 맞은편 뷔페식 중국식당 샹간에 들려 배불리 먹었다. O 선생은 김치․고추장․된장을 직접 담그고 있고, 한국어를 가르쳐 보려고 고려인 3세 자녀들을 서울대학교한국어연수까지 보낸 적이 있다고 했다. 민족의 전통은 음식과 언어를 매개로 모계 전승된다는 점을 O 선생은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연해주나 하바롭스크 인근에 고려인 자치주가 있을 법하지 않느냐고 O 선생에게 묻자 그런 움직임이 한때 있었는데, 요즘은 기미조차 없다고 했다. 하바롭스크 옆 비러비잔이라는 도시에는 고려인보다 숫적으로 소수인 유태인들이 자치구를 이루고 살고 있다고 했다. (2009. 12. 27)
▲아무르강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 아무르호랑이 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