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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反동북공정] 시진핑이 공부해야 할 역사의 진실들: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중국이 한국의 동네북
Dr.박
2018. 3. 31. 12:36
시진핑이 공부해야 할 역사의 진실들: 한국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중국이 한국의 동네북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7-04-30 19:20:05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왜냐하면 올바른 역사가 아닌 왜곡된 역사로 15억 인민들을 다스리고 주변국들과 외교하려다가는 언젠간 사달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공부해야 할 올바른 역사는 다음과 같다.
◈ 진시황 - 서이(西夷)족 문왕이 세운 주나라 이후 중국은 사분오열(四分五裂)로 갈라져 제후들끼리 서로 다투었던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가 전개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고는 처음으로 황제를 칭했다는 진시황(秦始皇)의 혈통도 동이족이었다. 진시황 정(政)의 친부(親父)는 여불위(呂不韋)였는데 여(呂)씨는 아래 강태공의 경우에서 보듯이 동이족의 성씨다.
흔히 별명인 강태공 또는 태공망(太公望)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성은 강(姜)이고,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라 강상이라고도 불리며, 그의 조상이 ‘여(呂)’ 땅의 제후로 봉해져 여씨 성을 가지게 되었기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린다.
여씨 성은 위 두 사람 외에 나라를 위해 흉노 묵돌선우에게 몸을 바친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치(呂雉), <삼국지>에서 최고 괴력의 장수 여포(呂布), 관우를 생포한 오나라 장수 여몽(呂夢)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동이족인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는 중국의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고(高), 노(盧), 여(呂), 허(許), 구(丘,邱), 강(強),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씨 등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후손으로 현재 상당수의 인민들의 국적은 중국인이나 핏줄로는 동이족인 것이다.
서안 동쪽에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진시황의 무덤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곳에서 볼 수 있듯이 출토된 병마용의 병사들 대부분이 동이족의 상징인 상투를 틀고, 우리 민족 고유의 갑옷인 찰갑비늘갑옷을 입고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역사 역시 결국은 동이족의 역사다.

▲ 동이의 상징인 상투와 찰갑비늘갑옷을 입은 병마용갱의 병사들 [이미지=필자제공]
◈ 만리장성 - 진시황이 흉노의 남진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장성을 현재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감숙성 임조(臨兆)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북성 동단 산해관(山海關)까지 장장 만 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과장이고 실은 산서성 남단 중조산(中條山=옛 갈석산)과 황하북부 하남성을 지나는 길이 약 천리 가량의 작은 장성에 불과하다.
참고로 만리장성의 동단(東端)으로 알려져 있는 산해관 장성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의 현판, 화살구, 봉화대의 방향으로 볼 때 동쪽 사람이 서쪽에서 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장성임을 알 수 있다. 바닷가에서 시작되는 산해관 장성은 평지를 지나다가 각산(角山)에서부터 산속을 지나 북경까지 이어진다.

▲ 산해관 장성은 동이족이 서토 오랑캐들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 [이미지=필자제공]
◈ 유방의 한나라 - 만약 유방(劉邦)에게 북부여 해모수(解慕漱) 단군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과연 한(漢)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유방은 당시 여러 곳에서 항우에게 밀리고 있었다. 낙양 근처에 있는 요충지 영양(滎陽)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항우에게 영양이 넘어가게 돼 힘의 균형은 거의 항우에게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은 그토록 어려운 전황 하에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역전할 수 있었을까?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초군(楚軍)의 향수병을 건드려 전투의욕을 상실케 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니라,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날래고 용맹한 기병들을 연(燕)나라 사람들과 함께 보내 유방을 도와준 덕에 항우와의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고(班固)의 <한서>고제기(漢書高帝紀)에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북맥은 바로 고구리의 전신인 북부여를 가리킨다.
이후 유방은 장안에 입성해 한(漢)왕조의 기틀을 세웠고, 한나라는 200년을 넘게 이어간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을 한족(漢族)이라고 따로 불렀으며 한나라는 한족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아이콘이 됐다. 만약 우리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한왕(漢王) 유방을 돕지 않고 초왕(楚王) 항우를 택했더라면 아마 중국의 역사는 한족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 전쟁에 참전했던 한나라 장수들은 모두 죽거나 처형됐다. 누가 이긴 전쟁일까? [이미지=필자제공]
◈ 한사군 - 유방이 북부여의 도움으로 항우를 물리치고 세운 한나라의 전성기는 바로 무제(武帝)의 제위기간이었다. 중국은 이때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식민지였던 한사군(漢四郡)을 한반도 북부에 400년간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엄청난 과대포장이다.
당시 무제가 보낸 한나라 군대는 번조선의 우거왕에게 연전연패해 전의를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또한 우거의 신하들은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잘 막아내 이겼으면서도 오히려 겁을 냈으며 이 전쟁이 제발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나라가 마지막으로 총공격을 해오자 우거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이 전쟁은 끝이 났으나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은 전쟁이었다. 무제는 항복한 5명의 번조선 대신들에게 땅을 나눠 제후로 봉했고, 도성으로 돌아간 육군사령관 순체(荀彘)와 수군사령관 양복(楊僕)에게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목을 베어 저작거리에 전시하는 기시(棄市)라는 극형에 처한다.
이런 전쟁 상황 속에서 그 부산물인 한사군이라는 식민지가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한나라 식민지인 한사군이 아니라 번조선의 자치령이었으며, 곧 이 땅은 졸본(卒本)에서 일어난 의병 고두막한(高豆莫汗)에게 접수되고 만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거늘 현재 식민지 한사군이 400년간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론은 <한서>를 쓴 반고의 붓장난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종군했던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으로 했다. 삼을 봉해 홰청후,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우거의 아들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비(로인)가 죽었으나 큰 공이 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180년 후에 나온 반고의 <한서>에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했다” 즉 조선을 평정(定)했다는 것이 조선을 멸망(滅)시킨 것으로 바뀌며 위 자치령 조선오군(홰청·적저·평주·기·온양)이 조선5군의 제후들의 이름까지 삭제해가며 식민지 한사군(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사군은 한족 사가(漢族史家)들의 붓장난과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 산서 남부와 북부 하남에 있던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로 옮겨진 모습 [이미지=필자제공]
◈ 왕망 - 중국의 상징인 한(漢)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역시 동이족이었다. 왕망은 원래 김(金)씨였으나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을 수치로 여긴 한족들에 의해 왕씨로 둔갑하게 된다. 왕망의 증조부는 바로 흉노 휴도(休屠道)왕의 왕자였다가 곽거병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끌려왔던 김씨의 시조 김일제다.
<한서 권68 곽광·김일제전> “김당(김일제의 증손)의 모친 남씨는 곧 왕망의 어머니로 임금과 같은 배에서 생산된 동생이라는 공이 드러났다. 김당이 남대행을 태부인으로 올렸다.(当母南即莽母功显君同产弟也。当上南大行为太夫人。)”라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 비어있는 김당의 아버지가 바로 왕망의 아버지다. 다른데는 다 이름이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neowav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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