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대전 속의 호남 의료진
병원 잘 되는 곳 찾아 나는 간다 '의사들의 대전부르스' |
[전국에 뿌리내린 전라도의 발자취] (8) 의대 없던 대전으로 향했던 호남 의사들 "80년대 병원 개원하면서 대전 선택한 것은 거기 의대 생긴 지 얼마 안돼 의사가 적었기 때문" 대전 전체 2500여명 의사 중 전남대ㆍ조선대 출신 150여명 충청권 의료서비스 기여 |
입력시간 : 2015. 09.08.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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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오십분/세상은 잠이들어 고요한 이 밤/나만이 소리치며 울줄이야/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1959년 가수 안정애가 발표한 우리나라 대표 블루스 곡인 '대전부르스'(작곡 김부해ㆍ작사 최치수)다. 1980년대에 조용필이 재취입해 새롭게 인기를 얻기도 했던 이 곡은 호남선 철도가 지나던 서대전역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끈적한 블루스 리듬과 애절한 가락으로 헤어지는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잘 담아냈다. 이 곡은 마치 1960년대 이후 전라도 사람들의 탈(脫)고향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특히 전라도 사람들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서대전역은 호남선이 경유하던 주요 정착역이었다. 돈이 없어 완행열차가 인기를 끌던 시절, 서울로 향하던 전라도 사람들은 서대전역에 잠시 정차하던 시간을 이용해 역 플랫폼에 자리잡은 가락국수를 먹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완행열차로 3~4시간을 달려와 중간지점인 서대전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먹는 국수는 꿀맛이었다. 40대 이후 전라도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을 겪었을 추억거리다.
이런 대전은 전라도 사람들의 애환을 그대로 담고 있는 지역이다. 새로운 삶을 찾아 무작정 서울로 향하던 전라도 사람들이 중간 지점인 서대전역에 내려 눌러앉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전지역 호남향우가 150만 대전 인구의 4분의 1 정도인 약 40만명으로 추산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대전에 지역 향우들이 자리를 잡은 것은 교통 요충지라는 점이 감안된 듯하다. 대전에서 호남출신 한국외식업중앙회장(재갈창균ㆍ신안)을 배출할 정도로 호남 출신들이 강세를 보이는 곳이다.
특히 대전은 전남대 의대 출신 의사들이 많은 지역이다. 대전에 광주ㆍ전남 출신 의사들이 많은 이유는 교통요충지로서의 역할보다는 예전 대전지역에 의과대학이 없었던 점이 강하다.
"80년대 말에 개인병원을 개원하면서 대전을 선택한 것은 대전에 의대가 생긴 지 얼마되지 않아 타 지역에 비해 의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대전에 종합병원도 제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광주보다는 대전에 정착하기가 더 낫겠다는 생각에서 타향을 선택했다. 80년대 이전에는 대전에 의대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선배들이 이미 정착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대전지역에도 충남대 등 의과대학 출신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이제는 광주ㆍ전남지역 의사들의 대전 진입이 그친 상태다."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자격을 획득한 뒤 1980년대 말 대전에 개인병원을 개원했던 의사 S씨는 대전에 호남출신 의사들이 많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S씨는 또 "개원 초기부터 밤 12시까지 근무하며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는 노력 끝에 지금은 확실한 뿌리를 내렸다"면서 "이제는 대전에서 의사로서 당당히 생활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광주지역 대학 출신 의사는 150명 정도로 추산된다. 85세부터 40대 중반까지의 의사들이 많다. 40대 중반 이전 광주ㆍ전남 출신 의사들은 거의 없는 상태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단위 광역시에 광주지역 출신 의사들이 대전만큼 많은 곳은 없다. 40대 중반 이상 대전지역 의사 가운데 광주지역 대학 출신이 10% 이상을 점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현재 대전지역 2500여 명의 의사 가운데 40대 중반 이상으로만 계산할 경우에는 15%는 넘어설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충남ㆍ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광주ㆍ전남 출신 의사수를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많다.
이처럼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지역 대학 출신 의사들이 유독 대전에 많은 이유는 대전지역 의과대학 신설이 늦었던 점과 당시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의료 수요지를 찾았던 광주 출신 의사들의 생존경쟁에서 비롯됐다.
실제로 전남대 의대는 지난 1944년 3월 광주 공립의학전문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5월 제1회 신입생 102명을 모집했고, 1952년 국립전남대 의과대학으로 개편됐다. 조선대 의과대학은 1966년 의과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다음해인 1967년 3월 첫 의예과 신입생 80명을 모집했다. 반면 대전ㆍ충남지역에서는 충남대 의과대학이 1967년 11월 신설돼 이듬해인 1968년부터 의예과가 신설됐다. 전남대보다는 24년 늦게 의과대학이 개설된 것이다. 이로 인해 대전ㆍ충남지역에는 지역의과대학 출신들의 의사 진출이 광주지역 대학 출신 의사들보다 20년 넘게 뒤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80년대 말까지 대전ㆍ충남지역은 타 지역 출신 의사들의 선점 경쟁이 치열했다. 서울이나 부산, 대구 등 대도시 대학 출신 의사들은 해당지역에서도 충분히 의사로서 경쟁력을 갖고 활동할 수 있었지만 전남대 출신 의사들은 지역적으로 열악한 경제수준 때문에 새로운 의료 수요지를 향해 대전으로 이동했던 것. 당시 광주ㆍ전남지역도 의료수요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의사들이 기대만큼의 수익을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의대가 없는 대전ㆍ충남지역이었다.
현재 대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남대 출신 의사 가운데 60대 이상이 절반을 차지한 것도 1980년 이전에 대전ㆍ충남에 정착했던 지역출신 의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전 H병원의 경우 원장 5명 가운데 4명이 전남대 출신으로 대전지역에서는 가장 잘 나가는 병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정착한 호남출신 의사들은 대부분 기대만큼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안정된 생활 속에 자녀들도 대부분 의사로 성장시켰다. 대전 이주 1세대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일궈낸 병원을 자녀에게 물려준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
호남 출신 의사들이 타향에 정착하기는 쉽지만은 않았다. 선후배 등 인맥이 전혀 없는 타향에 정착한 이들은 자신의 병원에 닥쳐온 모든 현안들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전지역 의사들은 "20년 이상 대전에 자리잡고 살다보니 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도 "그러나 의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선후배 관계 등 때문에 의사라는 전문 영역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의사에 비해 치의사는 광주ㆍ전남 출신이 많지 않다. 조선대 치과대학이 1973년 설립됐고, 전남대 치과대학도 1981년에야 개교해 치의사 배출시기가 그만큼 늦어 대전지역 대학출신 치의사들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광주지역 대학 출신 의사들의 대전 진출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들어서다. 충남대를 비롯 대전ㆍ충남지역에만 3개 정도의 의대가 신설됐고, 많은 의사를 배출하면서 광주ㆍ전남출신 의사들의 진입장벽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또 대전에 첨단시설을 갖춘 종합병원들이 들어서면서 이같은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이로 인해 현재 대전에서 40대 이후 전남대 출신 의사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제는 대전도 의사 포화상태 지역임을 짐작케 한다. 대전지역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면 정류장안내 방송멘트 말미에 "000병원을 찾아가시려면 000로 가세요"라는 선전 멘트가 타지역에 비해 유독 많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다. 또 대전지역 역이나 터미널 등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면 개인병원이 밀집돼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무한 경쟁에 돌입한 대전지역에 광주ㆍ전남 출신 의사들의 대거 이동현상은 추억 속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전ㆍ충남지역에 의대생 배출이 없던 시절인 1970~1980년대 광주ㆍ전남 출신 의사들은 충청권 의료서비스 향상에 큰 공헌을 한 것만은 사실로 남아있다.
글ㆍ사진=강덕균 선임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