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5.한국이 키운 일본은 부모를 이렇게 속였다!

Dr.박 2008. 6. 26. 16:26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 관계를 거짓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를 곧이듣고 사실인 듯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과거에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이를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첫 일본 역사책(주: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일어났다. 일본 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15-25대 일왕은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부여 혈통의 왜왕이었다."                                 -<부여기마족과 왜> 중에서-



 <일본 문화에 끼친 한국의 영향>

부제:일본의 숨겨진 역사  존 코벨 박사&알렌 코벨


  미국인 사학자 존 코벨(Jon Covell) 박사의 확신에 찬 증언이다. 코벨 박사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한일 미술사에 대해 가르쳤다. 오랜 동안 일본에 머물며 일본 미술과 역사를 연구하다 그 근원이 한국임을 알고 그 후 1970-8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약 10년간 머무르며 저술활동을 하며 많은 칼럼들을 기고하였다. 그의 한일고대사 연구는 학자로서 실제로 일본과 한국에 오래 동안 머물며 직접 연구한 것이라 큰 학문적인 신뢰감을 준다.

     

  코벨 박사는 한국의 절대적 영향력에 대해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첫 일왕들은 모두 순수 한인들이었다고 지적한 것으로 그쳤지만, 실제적으로 한일 사료들과 고고학 유물들에 근거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까지도 한인들의 혈통은 계속되었다. 구체적으로 일본 국보인 인물화상경에 '남동생왕(주: 男弟王은 계체왕(繼體王) 즉 게이타이왕을 지칭함)이 오시시카궁에 있을 때 사마(斯麻)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보내주시는 것이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백제 무령왕능에서 사마가 무령왕의 호칭으로 드러남으로써 게이타이왕은 무령왕의 동생임이 입증되었다.



                                KBS I 역사스페셜


계속해서 게이타이왕의 손자가 민달왕인데 일본 왕족과 귀족의 성씨를 조사한 책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민달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며, 민달왕의 손자는 <일본서기>에 백제대사를 지었다고 기록된 사명왕으로 바로 의자왕의 누이 제명여왕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혈연으로 맺어진 상국인 백제가 멸망하자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은 왜국으로 망명하여 실권자가 되었고 의자왕의 조카였던 38대 천지(텐치: 661∼671) 일왕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고국을 그리며 속국이었던 왜를 일본이라 개칭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에 이르렀다.



           백제의 고도 공주 무령왕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계속되는 역사조작에 대해 분개하며 코벨 박사는 이렇게 토로하였다.


  "왜 일본인들은 그들의 야요이 시대가 한국에 90% 의존했던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 일본인들은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일본 고분 시대가 90% 한국에서 받은 결과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일본인들은 7세기의 아름다운 아스카 불교예술이 한국에 90% 빚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 일본인들은 14-15세기 중세 미술이 한국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일본인들은 2000년 전 야요이 시대부터 5,6세기의 스에키 토기를 걸쳐 1000여 년 간의 일본 도자기 전통과 일본 다도에 쓰이는 다기가 16세기 이래 조선의 도공과 한국으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이 혜택을 입은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막대한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국교처럼 되어버린 신토(신도)도 일본 불교도 중세 수묵화도 모두 한인들에 의해서 주어진 문화적 선물이었다. 특히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법륭사(호류지)에 대해, "일본은 이 보물을 한국의 백제 땅이었던 전라남북도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고대 한류는 일본이란 나라와 그 문화 자체를 태동시키고 형성시켰던 것이다.

                               

  한일 고대사에 관해 일본 자체 내에서도 도쿄대의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국가의 기원과 정복 왕조>에서 '부여, 고구려계의 도래인인 진왕 등이 일본을 정복하고 일본 왕실의 조상이 되었다'고 발표하였고, 작가 시바료타로는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 문화 후기에 한국인에 의해 쌀농사 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 문화가 북규슈에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한인 이십 만 명이 일본 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고 고백하였고, 사학자 쓰다는 한국의 압도적 영향을 부인하고 일본왕가를 독립적인 만세일가로 둔갑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본서기>에 대해 '<일본서기>는 일본 왕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야마토 관인에 의해 작위된 것'이라며 학자적 양심을 지켰다.(주: 최태영 박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참조)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했고, 백제도 역시 진평과 요서를 차지하여 백제군을 두었다.'

            

  이는 중국 25 정사인 <송서>와 <양서>의 '백제전'의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임승국 교수는 <남제서>의 백제전과 <자치통감> 등에서 중국 북위의 군대가 백제에게 패배당한 내용에 대해 역사적으로 난해한 사건으로 남아있었다고 지적하였는데, 황하 유역에 있었던 중국의 북위가 막강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서 한반도 서쪽에 있던 백제와 싸워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인즉 당시 백제는 중국의 <송서>, <양서>, <남제서>에 쓰여있듯이 요서, 하북성(오늘날 북경 지역), 산동성, 양쯔강 유역(오늘날 상하이 지역) 등의 거대한 중국 동부 해안을 차지하여 다스렸는데, 그 왼쪽에 위치했던 북위와 대륙에서 패권다툼을 하여 이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사 교과서에 '백제는 요서, 산동, 규슈에 진출하였다'고만 기술하였는데, 중국 역대 통일 왕조의 수명이 길어야 이삼백 년 사이이고 백제가 요령성,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양쯔강 지역 등 각 지역에 지방 관리(태수)까지 임명해서 무려 이삼백 년을 다스린 지역에 대해 '진출'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학자적 양심으로 백제 제국의 일부였다고 기술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밝힐 때이다. 그리고 <남제서>의 '백제전'에서 보여주듯이 왜(일본)는 이 대제국 백제의 또 다른 속국이었던 것이다. 가령 오늘날도 미국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제국의 영토

                              

  한편 고구려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전역에 걸친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수당 통일 중국이 일백만 대군을 잃은 범접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민족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가 외국과 손잡고 동족 형제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친 것은 그 후 한민족이 겪게 된 ‘천년의 한’의 서막이었다. 따라서 역사에서 뼈져진 교훈을 얻은 우리는 오늘날 통일이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이나 중국 같은 외국 세력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결연히 물리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도움에 대해 그 이상의 대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당나라가 신라를 도왔다는 구실로 고구려 땅 대부분을 집어 삼켰고, 중국이 6. 25때 북한을 도왔다는 구실로 백두산 일대를 포함한 간도 전체를 독식했듯이 말이다.


  백제 제국의 아류로서 근세까지도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모든 문화를 수입하여 배운 처지였으며 오늘날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는 사실 조선 근세까지 일본인들을 지배한 대세였다. 예컨대, 코벨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가 궁중인들 중에서 누가 한국 춤을 가장 잘 추는지 뽑는 행사였고,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간청으로 파견된 조선 통신사 사절단에 대한 일본인들의 융숭한 대접과 비용 부담만(주: 옥스퍼드대 제임스 루이스 교수에 의하면 17세기에 일본은 국가 예산의 3% 이상을 조선 통신사 비용으로 사용함) 보아도 한류의 열풍을 실감할 수 있다. 즉, 조선의 관리, 학자, 문인, 의사, 화가, 음악가, 무술가, 곡예사 등 약 오백 명으로 구성된 이 사절단은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일본 명사들이 미리 모여 기다렸고, 선진 문화를 배우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으며 사절단의 수행원이 습작한 휴지까지도 가져다가 가보로 전했을 정도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기록과 유물, 그림에 전해진다고 최태영 박사는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주: 1868년의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의 길을 걸음) 이후 이 모든 것을 부인하고 8 세기에 위조된 <일본서기> 등에 근거해 자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역사가 자신들보다 무려 수 천 년 이상 앞선 조상의 나라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제3대 조선 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교육시책'에서 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는 코벨 박사가 제삼자로서 객관성있게 지적한 사실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 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전무후무한 역사 조작에 들어갔다. 먼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취임하자 1910년부터 1911년까지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해서 불태웠다고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는 밝히고 있다. 그 첫 번째 분서갱유 이후에도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몰수한 사료가 무려 4,950종이라고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게 1차적으로 20만권의 책이 불태워졌고, 2차에는 5천 종에 가까운 역사서들 특히 고대사가 적힌 책들이 일본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진 대숙청 가운데서도, 신라 법흥왕이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자체 연호를 썼다고 비난했던 소중화주의자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단군 왕검 한 사람이 천년 이상을 다스렸다고 적은 <삼국유사>가 위조된 <조선사> 편찬을 위해 남겨지게 된 것은 적군이 정복한 땅에서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씨를 말리고 아녀자만 살려두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기본적으로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하던 짓을 우리의 역사 조작에서도 그대로 되풀이했던 것이다. 결국 어용 식민사학자들은 1922년부터 1938년까지 조작된 <조선사>를 완성했는데, 이 조선사편수회에는 친일파인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이윤용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개입되었고, 이 중 일본인 이마니시와 한국인 이병도 등이 '단군 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말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해방 후 이병도 옹이 그가 키운 제자들과 그 제자들이 우리 사학계를 주도하며 국사 교과서를 편찬해온대 있었다. 그러나 이병도 옹은 죽기 전에 이렇게 학자적 양심을 밝혔다. 


  "역대왕조에서는 (단군을)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나...제사가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예전에 황장엽 옹이 망명 신청을 하고 남한으로 넘어왔을 때, 미 언론은 미국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을 떠난 것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황장엽 옹이 김일성 정권과 손잡고 바로 북한 50년 역사를 지탱해온 사상적 기반인 '주체 사상'을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주체 사상’은 철저하게 조작된 것이었음을 주체 사상으로 세뇌된 일부 북한 주민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과 본인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였다. 일제와 손잡고 한 때 이병도 옹이 위조했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이들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과 본인만큼은 그 역사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에서 단군 조선을 신화화하여 수 천 년의 한국 역사를 잘라냈고 반도 사관의 선봉에서 한족과 일본인보다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시킨 바로 그 장본인이 남긴 유언 아닌 유언이었음을 오늘날 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이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국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2006년도 상반기에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주관으로 미국의 의료진들이 북한의 백내장 환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을 때, 그 중 한 환자가 의료진들이 아닌 김일성 부자의 사진 앞에서 감사를 드리자 이를 보도한 미 방송사 아나운서는 그 젊은 환자가 영양 부족으로 백내장을 앓았던 것은 김 부자의 착취 때문인데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한다고 조롱했는데, 이들 사학자들이 바로 그 가련한 환자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도 일제 식민 사관을 고수함으로써, 우리를 철저히 짓밟았고 지금도 미국을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깎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독도는 일본 땅,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조작하는 일본에게 또 한 번 농락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란 그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판이한 해석이 나온다. 더욱이 고대사일 경우는 조금씩 남아 있는 사료들과 유물들을 토대로 역사서를 쓰고 가르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중국은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자국의 입지를 세우고 2세들에게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시키는 반면, 한국은 밝혀진 역사마저도 신빙성 결여라는 한마디로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 그 ‘신빙성 결여’란 그들 자신도 모를 정도로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버린 중화사상과 식민사관의 역사 코드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의 그 백내장 환자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들의 세뇌 교육에 놀아났던 사실을 깨달아야 하듯이, 일부 기성 사학계도 우리 민족을 불행하게 만든 일제의 각본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사 교과서를 다시 쓰고 2세들에게 위대했던 한민족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가르치기를 많은 국민들은 염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의 해악이 비단 우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두 나라가 세계 곳곳에 그들의 오류를 퍼뜨려왔고 동아시아의 역사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출처조차 확인하지 않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나라가 국가 기관과 진리를 탐구해야 될 학계까지 동원해 역사 조작을 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컨대 세계 최대의 교과서 출판사라는 피어슨 에듀케이션의 <세계 문명사>는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 지도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 우리의 맏형 고구려가 완전히 빠져있는가 하면 남부 지역은 일본 땅으로 표시되어있는 등 중일의 역사조작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세계인들 특히 세계 강국들은 눈부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며 정치, 외교, 문화, 스포츠의 영향력이 지대해진 우리를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를 극도로 폄하시킨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별 볼 일 없던 나라가 어쩌다 큰 것으로 생각하니 그들을 모든 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라도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즉, 이들 말대로라면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약소국으로 살아왔는데, 근래 어쩌다 큰 것을 오래 동안 세계 강국의 지위를 누려온 열강들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요 백제는 일본의 정치, 문화적 모국이었다는 사실을 바로 안다면 그들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이렇게 바뀔 것이다.


  ‘한국과 한민족은 예전에 아시아의 패권 국가로서 오래 동안 거대한 제국으로 군림하여왔기 때문에 중국도 늘 두려워하던 나라였으며 일본도 키워낸 나라였다니 놀랍구나. 중일의 역사 왜곡 때문에 우리가 동아시아 역사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라들이다. 중국을 보라. 아직도 인권을 유린하고 있고 발표한 경제, 군사 통계들을 보면 허위 보고들이 있다. 그처럼 역사 또한 조작해왔을 가능성이 많다. 일본을 보라. 지난 번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에 학자, 국회의원, 교수들까지 합세해서 위증을 하여 미 국회의원들이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내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그들은 한국의 고대사도 분명 조작하고 은폐했을 가능성이 크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라이다. 최근 드러난 고대사를 보면 이제 한국인들은 권토중래하는 것이며 예전에 그들이 누렸던 영광을 되찾고 있는 것뿐이다. 더욱이 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이미 우리들 중의 하나이며 통일이 되는 순간 한국은 일본과 독일도 능가할 무서운 저력이 있는 나라이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시작된 '천년의 한'이 승화되고 있는 현재 우리 민족의 비상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유명한 말처럼 우리 민족은 위대했던 고조선과 고구려와 백제의 후손으로서 중국과 일본에게 천년 동안 잃었던 패권과 영광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곧 그 주도권과 영광을 회복하여 다시 한 번 타고르가 노래했듯이 ‘동방의 빛’으로 세계 무대에 재등장할 것이다.


"네가 버림받고 미움 받아 지나는 사람조차 없었던 대신

이제 내가 너를 영원한 영예로, 대대의 기쁨으로 만들리라."(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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